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sther kim Dec 23. 2020

다른 누구의 운명도 아닌, 나의 숙명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 더 크라운 시즌 4

 메간과 해리 왕자가 왕실을 떠나던 날, 수많은 뉴스와 타블로이드가 이를 앞다퉈 다뤘다. 형제가 갈라섰고 여왕은 더 이상 그들의 사진을 걸어놓지 않다는 둥, 왕족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무의미해진 세상에도 미디어는 그 소식에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끝없이 뉴스 꼭지로 다뤘다. 사람들은 무관심한 와중에도 모두들 한 줄씩 훈수를 뒀다 (=악플을 단다). 메간과 해리는 ‘약간 유명한’ 일반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영국 왕실의 이야기는 그 어떤 리얼리티쇼보다도 흥미진진하다. 연예인들의 리얼리티쇼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가리어진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평범한 동시에 한심하면서도 멋지고, 자극적인 비밀들이 가득한지. 우리는 주어진 대본과 상황이 존재함을 알면서도 그 지어낸 내러티브를 즐긴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 왕실의 이야기를 드라마화한 이야기는 리얼리티쇼만큼의 위력을 지닌다. 더욱 흥미롭다. 왜냐하면, 왕실이 속 이야기를 나서서 대중에게 공유하지도 않을 것이며, 절대 리얼리티쇼 같은 것은 (다시는) 찍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삶이 극도로 비밀스럽고 소문만 무성하기에, 극사실주의 드라마화를 표방하는 프로덕션에는 대중의 몰입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Change will Challenge Tradition'


 더 크라운 시즌4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의 영국 왕실의 이야기를 담았다. 구체적으로 말해, 2차 세계 대전의 잔해를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태어나고,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여성인 마가렛 대처가 총리로 취임한다.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던 19살 다이애나 스펜서와 찰스 왕세자가 결혼을 하고, 그러한 세대의 변화에도, 1952년 즉위와 함께 약속했던 의무와 가치를 지키며 살고 있는 중년의 엘리자베스 여왕 2세의 이야기를 다룬다.

 시즌 4가 지금까지의 시즌 중 가장 재밌는 이유는 왕실이 굳게 믿고 있던 전통적인 가치들이 본격적으로 위협을 받기 시작한,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라고 하면, 다른 넷플릭스 시리즈인 ‘기묘한 이야기’의 배경이자, 마돈나, 마이클 잭슨, 스타워즈,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대중의 삶에 들어오고, ‘1988 응답하라’의 덕선이가 살았던 시대이다. 너무나 가까운 과거로 느껴져서인지, 현대화되는 현실과 이토록 상충되는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도 한다.

 당장의 먹고사는 일상이 무너지고 있는 국민들에게 사회 경제에 대한 왕실의 권위주의적인 무관심은 돌팔매질을 당한다. 혈통과 결혼 같은 배경의 도움 없이 오직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위치까지 올라온 대처 수상에게 제국주의의 규율과 가치에 머물러 있는 그들의 게으름은 어떠한 영감도 주지 못할뿐더러 한심해 보이기까지 한다. 여느 10대 20대처럼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중문화를 즐기며 살아온 갓 스무 살의 다이애나에게 그들의 연막에 가려진 듯한 이중적인 환대와 시대착오적인 끝없는 프로토콜은 버킹엄 궁전을 차가운 시멘트 감옥 방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군주와 제국이라는 개념의 유의미함을 모두가 의심하기 시작한 그 무렵. 그 무렵에 놓인 왕실의 젊은 후계자들은 자신들의 가치관과 역사적으로 부여된 그들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고 불행하다면 과감한 변화를 꾀해야 한다. 다소 불편한 변화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적인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노력이 꼭 질책받아 마땅한 일도 아니라는 것을 일반 시민들도, 최고위 정부수반도, 왕실의 젊은 후계자들도 알고 있다.
 대처 수상은 매너리즘에 빠진 나이 든 내각 의원을 모두 갈아엎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시대를 펼친다.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직격탄을 맞은 일반 시민이자 실직자인 마이클 페이건은 변화를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버킹엄궁에 몰래 침입해 여왕과 독대를 한다. 다이애나 공주는 이전까지 대중이 왕족에게서 볼 수 없었던 적극적인 감정 표현과 활발한 자선활동을 함으로써 이제껏 왕실의 일원 중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고, 외로운 결혼 생활에 지친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찰스 왕세자는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며 두 번째 기회를 얻고자 한다.




 더 크라운이라는 큰 이야기의 기틀에서, 변화를 꾀하는 이 인물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왕족이 아닌 대처와 페이건은 그저 어떤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왕족인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공주는 어떤 특정한 ‘숙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운명과 숙명은 같은 의미를 가진 말 같지만, 분명히 다른 지배력을 가진다. 운명이라 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섭리와 같은 것인데, 이는 슬프고 두려운 일에 쓰이는 말이기도 하지만 기쁘고 마법 같은 일에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초자연적인 힘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의 운명은 네가 만든다”라고 할 만큼, 노력 여하에 따라 극복 가능한 에너지라고 믿기도 한다.

 그에 반해, 숙명은 순전히 사람, 그것도 나보다 권위가 강한 사람이 정해놓은 나의 운명이라는 점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행복한 만남이나 행복한 엔딩을 일컬을 때 숙명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의 숙명은 그것을 지정해버린 권위자만이 바꿔줄 수 있다. 어쩌면 숙명이란 말는 원죄라는 말과 결이 비슷하다.


 왕실의 가족은 길게는 10세기부터 이어져 온 왕실의 가치와 역사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간단한 임무이자 숙명을 갖고 있다. 그 가족의 일부가 되면 대단한 고뇌와 노력을 요하지 않는 속 편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받은 동시에,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단 한 가지의 존재 의무를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할 사람하고 헤어지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의견과 감정 표출은 일절 삼가야 하는 아이러니한 불행 속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숙명에 대해 기이할 정도로 복종하는 것, 또는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것이 왕실의 사람들이다. 숙명이라는 미명 하에 그 어떤 잡념도 좌절된다.


1952년 즉위식. 25살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2020년 현재, 곧 95세를 바라보는 엘리자베스 여왕 2세의 삶은 그런 숙명에 대한 의무,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도 그에 대해 예외를 두지 않는 그녀의 책임감에 기반한다. 영국이 더 이상 군주제를 따르지 않는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왕실이 갖는 상징성과 진귀함이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추측이지만, 그녀가 적게는 70년, 많게는 95년 동안, 책으로만 알 수 있는 과거의 전통을 하루도 빠짐없이 몸소 살고 있는 역사의 산증인이자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0대 때 본인이 약속한 그대로 영연방 국가들에 잊지 않고 관심을 보이고, 매주 영국 수상과 갖는 미팅을 70년이 넘도록 빠짐없이 수행한다. 더 크라운에 출연한 영국 배우들은 왕실의 가족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억양과 말투가 얼마나 독특하며 그것을 연마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영국에 사는 일반인은 그런 억양을 가질 수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꼿꼿한 자세, 흐트러짐 없는 표정과 말투에서는 그녀가 현재까지도 공식적인 자리에 얼마나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숙명에 대한 책임감과 95년 동안 몸에 밴 그녀의 습관이 그녀가 살아있는 역사임을 증명한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습관, 알고 있는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아마 수십 년 전 영국 왕실의 모습을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확고하게 지켜온 여왕의 성격 덕에 더 쉽기도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이 세운 새해 계획 한번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반복되는 의무에 대한 지루함을 이겨내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우리 모두는 안다. 짧은 임기 동안 책임감을 갖고 마지막 순간까지 처음의 약속을 지키는 세계적인 지도자를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오늘날, 여왕이 세월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지난 역사의 일부를 몸소 실천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외부인인 우리에게는 매우 숭고하고도 신기하고, 가히 존경스러운 일이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그런 철두철미한 신념이 후대에게는 족쇄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 또한 그녀의 숙명인 것이다.




 일반 서민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숙명이라는 논리가 1980년대, 가장 비밀스럽고도 공개적인 한 가정을 파국으로 이끈다. 그 생소하지만 불가피한 논리로 왕실 내에 꿈틀대는 자유의지가 끊임없이 굴복되는 이 기구한 드라마가 어쩐지 낯설지 않다.

 또 한 번 배우들이 바뀔 시즌 5에서는 90년대로 들어선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대로, 젊은 후계자들은 변화를 촉구하고, 숙명을 벗어나 운명만을 따르고자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을 되찾기까지 누군가는 굽혀지고, 누군가는 부러지고 말 것임에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 자신을 마주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