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잘하고 싶다
‘외국인 만나도 무서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딱 내 영어 수준이라고 자평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공통된 관심사가 있다면 어렵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주제에 대해 수준 높은 대화를 하거나, 막힘없이 조크를 날리면서 대화를 하는 레벨까지는 아직 아니다. 아직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어야 하고 상황에 적절한 어휘들을 생각해 내야 한다.
영미권 국가에 한 번도 발을 내디뎌본 적이 없는 토박이로서, 영어는 항상 무서움 그 자체였다. 실제로 학창 시절 때 가장 싫어했고, 못하던 과목 중 하나가 영어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능 끝나고 물 만난 고기처럼 놀던 시절, 홍대 게스트하우스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외국인을 만난 것이 터닝 포인트였다. 수업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같이 놀러 다녔다. 그때는 완전 꿀 먹은 벙어리나 다름없었으나, 하고픈 말이 많았다. 그래서 일부러 표현들을 찾아보고 다음날 놀러 가서 써먹곤 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말문이 트이는 걸 느꼈고,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는 나 스스로를 영어 환경에 많이 노출시켰다. Language exchange cafe에 가서 외국인들과 말을 섞어 볼 기회를 만들었고, Youtube 채널을 통해 현지 느낌의 표현들을 익혔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전공 수업을 영어로 듣기도 했다. 영어로 강의를 듣고 시험 치고, 심지어 팀 프로젝트까지 외국인들과 영어로 했다. 마지막으로, 지난 학기에는 영어토론동아리에 들어 꾸준히 참석했다. 아무래도 영어 토론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떠들어대니 굉장히 재미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리 내 스터디를 통해 자기주장을 펼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모두 배움의 현장이었지만,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즐거운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영어 실력을 열심히 갈고닦았다고 생각하고, 교환학생을 왔다.
그러나...
탁구처럼 1대 1로 주고받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부분은 크게 어려움이 없다. 주로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예상되는 범위 내에서 대화가 이루어진다. 대체로 본인의 출신 국가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을 묻거나, 체코에 온 이유, 본인의 전공 등에 대해 묻곤 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반복적인 질문을 받다 보면,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아직 학기 초창기라서 그런지 기본적인 호구조사에 대한 대화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간단한 내 의견이나 감정 그리고 경험한 것들에 대한 공유는 어렵지 않다. 주로 ‘어느 나라 여행해 봤으며’, ‘학창 시절을 어떠했으며’, ‘프라하에 대한 감정’ 등을 이야기하곤 한다. 대체로 간단한 문장 구조와 단순한 단어로도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고, 상대방 눈을 응시하면서 말하면 얼추 다 알아듣는다. 게다가 맥주 한 잔까지 곁들이면서 이야기하면 3~4시간은 거뜬하다.
하지만 대화에 참여하는 인원수가 늘어날수록 난이도가 올라간다. 내가 커뮤니케이션의 주도권을 잡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지만 쉽지만은 않다. 영어로 말하다 보면 단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뜸을 들일 때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과 얘기할 때면 그 공백이 참 난감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매끄럽게 이어나가지 못하면 답답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다른 것으로 넘어가 있고, 나는 추임새만 넣고 있게 된다.
그리고 1대 1로 대화하는 것과 달리, 다수의 그룹에서 이야기할 때면 질문이 자유롭지 않다. 특히 처음 듣는 고유명사들이 많아서 난감할 때가 많다. 그게 지명일 수도 있고, 사람 이름일 수도 있고, 특정한 과목일 수도 있다. 맥락에 따라 유추는 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알고 대화에 참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는 말을 끊고 물어보면 되겠는데, 그룹 토킹을 할 때는 그러기가 힘들다. 매번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느새 또 관전자 모드가 발동된다. 제길, 리스닝 하나만큼은 기막히게 연습되겠다.
이누이트, 에스키모 족에게는 눈(snow)을 설명하는 어휘들이 수십 가지가 된다고 한다. 우리가 눈을 바라보는 개념과는 달리 그들은 더욱 세분화하여 정의한다. 생활하는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하는 단어에도 차이가 있다. 만약 이누이트족과 만나 눈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대화하기가 꽤나 힘들 것이다.
나는 주로 한국에 대해 설명할 때가 많은데, 한국 단어와 정확하게 매칭 되는 영단어를 떠올리기가 정말 힘들다. 설사 생각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확실치 않다. 당장 김치에 대해 설명한다고 생각해보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은 cabbage(양배추), grinded chili(고춧가루), ferment(발효), mix(섞다) spicy(매운) 등등... 서양에는 배추나 고춧가루라는 개념이 없어서 비슷한 단어들로 대체시켜서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들로 김치가 어떤 음식인지 설명하려면 2% 부족한 것을 느낀다. 뭔가 석연치 않게 마음에 안 들고, ‘이게 맞나?’라며 계속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또 말을 더듬게 된다. 으...답답하다.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 걸림돌이 될지는 상상도 못 하였다. 아무래도 체코에 교환학생을 와 있다 보니 유럽권 학생들이 많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이해 못하는 문화적 맥락들이 종종 있다. 하루는,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뤼시 같다(아일랜드 사람 같다)” 라는 말이 나왔는데, 다들 막 웃는 것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나는 멋쩍게 웃고 있다가, 나중에 한 명 붙잡고 물어봤다. "Why are you making fun of Irish?". 왜 아일랜드 사람들을 가지고 조롱(?) 하냐고 물었는데, 그런 의도는 전혀 아니라고 했다. 차별이나 비하의 의도보다는 그 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이용한 농담이라 했다. 유럽에는 각 나라마다 국민적 특징 같은 것이 있는데 그런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깊게 대화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아마 한국으로 따지자면 ‘느린 충청도 사람’, ‘서울깍쟁이’와 같은 그런 지역적 농담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유럽에도 이런 관습적 인식들이 있을 테니까. 이를 통해 문화에 대한 이해가 커뮤니케이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을 느꼈다. 수준급의 대화를 하려면 언어 이상의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쓰다 보니 죄다 문제점들밖에 없다. ㅠ 이번 기회에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제대로 느꼈다. 그동안 나는 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좀 더 잘 하고 싶다. 별 수 있나. 앞으로 사람들 만나고 반복해서 써먹는 수밖에. 뇌에서 한글을 안 거치고 바로 영어가 튀어나올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부딪혀 봐야겠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많이 놀고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