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물면서 비교적 가까운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여행을 떠났다. 도시를 이곳저곳 누비며 탐방을 하고 있는데, 함께 여행하던 친구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횡단보도 신호등 사인에 하트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신호등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 신호등 사인에는 두 명의 사람 사이에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별 것도 아닌데 괜히 앙증맞고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잠깐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남녀가 그려진 사인이 아니라, 신호등 안의 두 인물들 모두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빛이 번져서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았다. 신호등에는 치마를 입은 두 명의 여성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상당히 의아했었는데, 그 궁금증은 곧바로 풀렸다. 건널목마다 다른 조합의 신호표시가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남+녀 / 남+남 / 여+여 의 조합이 있다는 것이다. 초록불/빨간불 까지 하면 총 6가지의 조합이 나온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 왠지 모르게 들떴다. 굉장히 생소면서도 신선했고, 이런 메시지가 시내에 알게 모르게 숨겨져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조합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신호등을 찾아 나서기까지 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남+남 빨간불 신호등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고, 남+녀의 빨간불 신호등에는 심장박동 표시가, 여+여의 빨간불 신호등에는 가슴에 하트가 그려져 있다. 초록불은 커플이 사이좋게 길을 건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특히 남녀 조합의 초록불 신호등에서 여성이 남성의 손을 잡고 이끄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일반적인 남+녀 조합에서도 남자가 앞장서고 리드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고를 뒤집어 버린 포맷이었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캠페인도 아니고 잠깐 동안 진행하는 행사도 아닌, 가장 일상적인 시설물에 저런 아이디어를 대입했다는 것이 놀랍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은 횡단보도에서 항상 신호를 주시하게 될 텐데 노출 효과도 뛰어날 것이다. 거부감 없이 일상으로 스며드는 변화와 그 효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더불어 이런 환경을 만든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와 비엔나가 어떤 도시일까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다른 나라의 관습, 문화 그리고 생활양식을 지켜보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우리나라와는 무엇이 다른지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것. 내가 항상 바라 왔던 여행의 양상이다. 비엔나에서는 이런 목적을 제대로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야경 및 볼거리들과 함께 즐거운 여행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 친구는 정치인 또는 시청 관계자들이 저런 시설물을 설치하기 위해 발의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귀엽다고 했다. 나도 동감하는 부분이다. 제안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행되기 위한 합의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나
+) 모든 신호등이 위와 같은 디자인은 아니었다. 시가지의 몇몇 신호등만 그러했다.
위는 비엔나 시청의 야경 모습이다. 시청사 야경도 비엔나 관광명소 중 하나인데, 시청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서 일하면 저런 신호등을 기획할 정도의 창의력이 샘솟는 것인가...비엔나도 시청 공무원이 아마 신의 직장이 아닐까 싶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