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섯 걸음
살다 보니 낙인처럼 느껴졌던 일이 몇 번 있었다. 본디 낙인 또는 주홍글씨라는 게 남한테 말하기엔 부끄러운 법이라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느끼는 아내 외에는 얘기해 본 적이 없었지만 글의 힘을 빌어 써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3이었던 시절 당연하게도 내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는 수능시험이었다. 자잘하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더 있었겠지만 그 시절의 난 수능시험만 끝나면 강제로 주어진 학업이라는 업보를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삶을 살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원하던 대학교를 선택할 수 없었다. 그 뒤로 한동안은 짙은 패배감에 빠져 지내게 되었는데.
친했던 친구와도 연락을 끊었고 나를 모르는 곳에서는 이상한 망언을 내뱉었다.
가령..
[사실 컨디션만 좋았다면 내가 XX 정도는 충분히 갈 수 있었어.]
[순전히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거기 갔어도 지금 내 환경에 맞지도 않았어. 안 가길 잘한 거지.]
시험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록 난 여전히 고3의 굴레에 갇혀 있었고 상상으로 만들어 낸 내 모습을 진짜라 믿으며 남들에게도 허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에서야 지나고 나니 어이없던 해프닝 정도로 치부하게 되었지만 이십 대 내내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주홍글씨 중 하나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생긴 낙인도 결은 비슷했는데.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속했던 그룹에서도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회사와 아닌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물론 꼭 이름 있는 회사여야만 인재가 있는 법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좋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건 일반적으로 누구나 생각하는 것이겠지.
[내가 지금 그 회사를 못 간 게 아니라 안 가는 거라고. 지금은 여기서 할 일이 남아 있어.]
[맘만 먹고 시험 준비하면 이직 못하겠냐고? 안 그래?]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서라고. 그리고 언제든 마음먹으면 당당히 입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지는 건 나였고 그걸 깨달았을 땐 어느새 30대가 되어 있었다. 또 다른 주홍글씨 하나가 내 몸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다.
조금 결이 다른 얘기지만 지금은 무교임을 미리 밝힌다. 내가 생각하는 무교는 믿는 종교가 없다는 것도 있겠지만 언제든 다양한 종교의 괜찮은 교리나 신앙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굳이 남들이 배척하는 종교를 찾아보려고까지 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 키워주셨던 증조할머니께서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자주 굿판에 데려가셨다.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내게 따스하게 대해줬던 무당 할머니의 모습이 가끔은 생각난다. 내 앞에서 작두에 올라타건 이상한 소리를 하건 그런 건 관심 밖이었다. 단지 내 손에 쥐어준 한과 하나에 더 정신이 가 있었을 뿐.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는 할머니가 그런 곳에 날 데려간다는 걸 상당히 못 마땅해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믿고 따르던 신앙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유일신이 아닌 우상이나 귀신에 대한 숭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으셨던 거겠지.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굉장히 배타적이셨고 자연스럽게 난 아버지의 의지를 이어받았다.
누구를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판단하는 기준은 내 것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대물림된 종교적인 기준에 의해 이뤄진 경우가 상당했다.
생의 전반적인 부분에 걸쳐서 영향을 받았는데 성개념, 타 종교에 대한 태도, 평상시 기도 습관 등 생각보다 많은 부분과 관련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연이 되었던 종교가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이단으로 분류되는 집단이었다.
정체를 알면서도 연이 되었던 이유는 순전히 사람들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마음 한편에서는 그런 마음이 드는 나 자신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언제나 내면에서의 갈등이 생겼다.
인생에서 짧게 주어졌던 시간이었지만 내가 가진 신앙관과 타인이 가진 신앙관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를 나눴던 그 시간은 내게 큰 울림을 주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어디에도 내가 이단 종교와 연이 있었다는 걸 얘기해 본 적은 없었다. 스스로 주홍글씨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아함경]이라는 책을 읽었다. 사실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고 특히 불교엔 큰 관심도 없었다.
'석가모니라는 분을 믿는 곳 아닐까?' 정도가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의 수준.
하지만 불교에서는 직접적으로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믿음을 강요하지도 변화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단지 종용할 뿐.
그리고 책을 읽다 보니, 인간적인 모습으로 고뇌하는 석가의 모습이 공감됐고 남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문득 내게 주홍글씨처럼 여겨졌던 많은 일이 떠올랐다. 혼자 끙끙 앓으며 감추기 바빴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돼.'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나 잠재적으로 알게 될 사람에게 들키면 부끄러울 거라 여겨 싸매온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혼자 일을 키우고 복잡하게 만들었던 게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주홍글씨처럼 여겼던 일을 진작에 터놓고 얘기하고 해결하려 했다면 시간도 아끼고 좀 더 빨리 나은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세상 일이라는 게 지나 봐야 알게 되는 것 투성이라고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앞으로도 주홍글씨처럼 생각되어 숨기고 싶은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과거에 어리석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좀 더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기를. 내게 주어진 시간을 좀 더 아끼고 소중하게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