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걸음
오랜만에 남이 운전해 주는 타를 탔더니 너무 편했다.
'이 시간이 지속되면 좋겠다.'
차가 있어서 좋은 점이 훨씬 많지만 가끔은 운전대를 놓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하루가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운전을 안 했을 뿐인데도 행복을 느끼다니, 이런 게 서비스업의 매력이지. 정말 여유롭다 못해 흘러 넘 칠 재력만 있다면 운전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높여줄 다양한 서비스를 누려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확장됐다.
어제는 분명 집안일을 해보겠다며 글을 쓰더니 막상 서비스를 받고 싶다?
역시 인간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법이로구나.
1박 2일간 서울로 놀러 갔다 왔다. 예전에 서울에서 지낼 때만 해도 서울로 놀러 가는 일은 이해하기 힘든 일 중 하나였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면 되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더 이해가 안되었던 거 같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바로 [마음먹기] 아니겠나. 그 쉬운 듯 어려운 일을 늘 하지 못해서 막상 물리적 거리가 가까웠던 시절엔 서울을 제대로 여행해보지 못했던 거 같다.
이번에 여행 간 곳은 크게 새로운 곳도 아니었다. 물론 아이들에겐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곳이었으니 특별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행지는 바로 롯데월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가지 않던 놀이동산을 멀리 지방으로 이사 간 후에야 다 같이 가는 것도 참 묘한 기분이었다.
"오빠. 이번에 경비가 얼마나 드는지 알아?"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경비 얘기를 하기 전만 해도 딱히 경각심은 들지 않았었다. 입장권도 당근으로 할인하는 티켓을 사서 입장했으니 괜찮지 않을까라고만 생각했었다. 모든 계획을 입으로만 말하는 나와, 실제로 결제 및 진행하는 아내의 입장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왕복 교통비가 대략 15만 원 정도 들어가고, 티켓비용은 13만 원 정도 들어가고 추가로 숙소비에 이것저것 식사랑 부대비용 포함하면 50-60만 원 정도 쓸 거 같은데? 알고 계획한 여행이지?"
모르고 계획한 여행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날 가만두지 않을 것만 같은 그녀의 눈빛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진정되지 않는 떨림을 숨기며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응. 그것이 여행이니까. (끄덕)"
아내의 눈에선 레이저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빠르게 눈길을 피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는 황급히 앞으로 이동해 버렸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생각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서울 여행 몇 번 했다간..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진 않겠지만. 이렇게나 많이 쓴다고? 진짜로?'
이것이 대한민국 수도의 위엄인 것인가? 가격을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펀쿨섹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모든 게 돈.. 돈.. 돈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백수 주제에 괜히 여행 가자고 망언을 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하필이면 놀이동산에는 온갖 초, 중, 고의 학생들이 단체로 여행을 오는 바람에 어딜 가든 기본 60분 이상 씩은 기다려야 했고, 인기 있는 놀이기구는 120분 가까운 시간을 들여야 했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 가지 편한 방법은 있었다. 한 번도 이용해 본 적 없는 마법의 치트키 [매직패스]를 이용하면 손쉽게 해결이 가능한데, 이 또한 추가금이 들어가고 아직 둘째는 키도 미달인 상태라 함께 즐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아빠! 집에 가고 싶어요. 나 다리가 부러질 것 같단 말이에요! 어린이는 원래 오래 못 서있는단 말이에요!!!!!!"
몇 시간씩 걷는 강행군에 결국 큰 아이는 폭발해 버렸다. 과연 이 여행은 누구를 위한 여행이었단 말인가? 사실 무릎이 좋지 않은 나 또한 발바닥과 정강이에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는데.
[아내의 째려봄 + 아이의 투정]은 여행 계획이 망했다는 걸 알려주는 지표일까? 한 순간 나의 판단 미스로 돈은 돈대로 쓰고 제대로 된 추억도 못 남기게 되는 것일까 봐 마음이 아파왔다.
우여곡절 끝에 점심을 먹고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뭐라도 먹으니 다시 힘이 좀 돌아왔다. 그래봤자 한번 아프고 무거워진 다리가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친 우리는 일단 3층에 위치한 민속박물관으로 대피했다. 우연히 본 [불청객]이라는 K-오컬트 무료방탈출을 즐길 수 있다는 표지판을 봐서였다. 솔직히 글로 읽는 거면 몰라도 직접 겪는 공포체험은 끔찍이도 싫어했기에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는데 아이들이 원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10분의 시간 동안 즐길 수 있는 적당한 난이도의 방탈출이었는데 다 같이 즐기고 나자 오전의 힘들었던 기억이 비로소 나아지기 시작했다. 여행의 시차에 적응하듯 마침내 이곳에도 적응을 하게 된 것일까? 나를 짓누르던 경비의 압박도 다소 떨쳐내고 그때부턴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더 좋았던 건, 민속박물관 투어를 끝내고 오후 시간대가 되자 엄청난 밀도를 자랑하던 초, 중, 고 학생들이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일이었다. 숨 막히던 갑갑함에서 해방되자 잔뜩 예민해지고 긴장했던 우리도 살짝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나름 늦은 저녁 시간까지 놀이동산을 즐겼다.
숙소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 꿈만 같아요. 게다가 복층이라니~ 놀러 오길 잘했다아!"
특별히 한 거라곤 놀이동산에서 있다가 숙소로 온 게 전부였지만, 몸이 고단한 상태에서 묵을 곳이 있는 일은 정말로 굉장한 쾌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오빠. 나 왜 사람들이 여행하는지 이제 좀 알 거 같아."
레이저를 쏘아대던 그녀도 체념을 해서일까? 이제는 제법 말랑해져 있었다. 이미 손에는 맥주를 한 캔 따서 들고 있기도 했다. 술 때문인지 피로함을 풀 수 있는 공간의 아늑함 때문인지 저마다의 행복을 느끼며 우리는 숙소를 즐겼다.
새벽같이 일어나 첫 차로 속초행 버스를 탔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어서인지 아이들은 아쉬워했다.
"다음엔 며칠 더 있고 싶다아."
비록 돈은 썼지만 함께 있는 즐거움과 기억을 위해 투자한 셈 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이번 투자는 100% 원금 손실이 날 투자상품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미 매 순간이 여행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비용을 써가며 움직이는 느낌은 또 다르달까?
"정신 차려. 그러다 거지꼴을 면치 못할 거야. 그리고 누가 가겠대?"
다시 또 아내의 눈에서 레이저가 발사될 준비가 시작되는 걸 보니 이제 글을 접어야겠다. 아내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다 전달하진 못했지만, 아마 그녀도 내 맘을 알지 않을까?
비록 비싸고 멀리 떠나는 여행도 아니고 1박에 그친 일정이었지만, 뭐 어떤가. 꼭 파인다이닝을 먹어야만 한 끼 잘 먹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지금의 사정에 맞게 가족과 함께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는 걸로 됐다. 게다가 지금 내 상황에서는 이 정도 비용의 여행 또한 그 어떤 호화여행 보다 부럽지가 않다. 조금씩 삶이 나아져 허락된다면 다른 여행을 통한 여행기 또한 남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