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성프리맨 Nov 15. 2024

Typing...

162 걸음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게 TV에서 나오는 뉴스였었다. 그런데 어른들은 볼 게 없으면 뉴스에 고정을 시켜놓곤 했다. 보면 정치 얘기로 시작해 사회적인 이슈가 나오고 끝날 때쯤 돼서는 짤막하게 해외토픽을 알려주고 스포츠 소식과 날씨를 끝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나마 스포츠 뉴스가 가장 재미있었달까? 우연히 신문을 보게 될 일이 생겨도 연예 소식이나 스포츠 소식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갔었다.


언제까지나 취향이 변하지 않을 줄 알았건만, 40대가 된 지금의 난 예전의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볼 게 없으면 뉴스를 찾아보게 됐다. 심지어 그런 소식을 보는 게 재미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세상에.. 늙으면 다 똑같아지는 건가?'


오히려 어렸을 때 재밌게 읽거나 봤던 연예와 스포츠 소식엔 점점 흥미가 떨어지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점점 재밌어지고 있다. 사람을 더 못 만나게 돼서일까? 활자나 영상으로 접하는 소식마저 없다면 요즘 세상의 분위기를 못 쫓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수준에서 어른을 이해하기 힘든 게 당연하듯, 마찬가지로 어른의 시선에서 아이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물론 한번 지내온 어린 시절이기에 누구보다 아이의 관심사를 잘 알 거 같지만 막상 그렇지도 않다. 때로는 아이가 원하는 걸 알면서도 귀찮아서 혹은 진짜로 이해가 안 돼서 못 들어줄 때도 많다.


아이는 서운해할 것이다. 어째서 이해를 못 해주는 걸까? 

그리고 다짐한다. 나는 저 나이가 되면 절대로 안 그래야지.


절대로 안 그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의 날 보면 과거를 새카맣게 잊은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매일을 반성하고 다짐하고 다독이지만 특별한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다. 그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기록한다. 


[둔필승총(鈍筆勝聰)]

둔한 붓이 총명한 머리를 이긴다. - 정약용


정약용 선생님처럼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또한 머리에 의존하지 않고 기록하려 했듯, 범부인 내가 감히 기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나마 변하지 않는 나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면 기록을 통한 바라는 목표의 [개념화]가 이뤄져야 하지 않겠나. 그러기에 오늘도 반복적이고 소모적으로 보이는 글을 써 보는 것이다.




10년 전의 내게 가장 중요했던 게 지금 와서는 1순위가 아니게 되었다. 그때는 하룻강아지 주제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짖기 바빴다. 


"내 말이 맞는 말이니 좀 들어라 이것들아!"


때로는 훈계에 가까웠고.


"내가 경험해 보니까 이게 진리에 가까웠음."


때로는 오만했으며.


"아니 이렇게 행동 안 하는 게 능지가 처참한 수준 아닌가?"


때로는 조롱을 일삼았다.


그리고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나의 행동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애써 웃으며 넘긴 것이 '내게 주는 벌이었구나.'라는 것을. 굳이 힘써가며 말을 섞을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애정이 있는 사람은 듣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조언]이라는 것을 해주기도 했지만, 하룻강아지는 조언을 이해할 능력조차 없었던 거다.


이해하는데 자그마치 10년이 흘렀다. 약간의 과장이 보태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해가 둔한 자는 결국 시간이 흘러가는 형벌에 처해져 뒤늦은 후회를 할 뿐이구나.


가끔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조언을 일삼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다가 애써 억누르며 튀어나오려는 조언을 막곤 한다. 지금 내가 말을 한다 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래도 자식은 챙겨야 하는 거 아니요?


욕심이 생겨날 때가 있다. 나의 생이 아님에도 자식의 삶에 간섭하고 싶어질 때가 더러 있다.


"내가 살아보니 말이다. 인생의 진리는 어쩌고 저쩌고-"


나의 지나온 생이 아이에게 해답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함부로 조언을 못하겠다. 


'말로 할 수 없는 걸 대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그래서 글을 택했다. 읽고 안 읽고는 순전히 아이의 자유.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받아들일 것이고, 걸러낼 부분은 넘기려니 한다. 말은 영원하지 않아도 글은 어딘가에서 좀 더 오랫동안 유지될 것임을 믿기에.


'아빠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40대를 보냈단다. 너희들의 40대는 또 어떤 재미가 생길지 아빠도 궁금하구나.'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때 아이가 (감사하게도) 글을 읽어준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나와의 추억을 좋은 방향으로 간직하고 있어 줄까?


이쯤에서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기록에 집중하자. 기록에 담긴 감정은 결국 받아들이는 이의 몫일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곁을 내어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