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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게매니아 Jun 04. 2017

우리는 모두 경계선에 서있다.

언노운 걸

느낌으로만 존재하는 영화가 있다. 뭔가를 분석하려 열심히 노력해도 너무 플랫해서 도저히 뭘 분석할지 모르겠다거나, 영화에 대해 어떤 얘기들을 하기 위해 뭔가를 아무리 뒤적거려도 도저히 특이한 것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영화 말이다. 


이런 영화의 특징은 상영 후 상영관을 나올 때 찾을 수 있다. 어떤 씬이 멋있었어, 아니면 어떤 장치가 죽이더라. 이런 얘기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 그냥 영화관을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아 이 영화 참 좋다. 뭐 이 정도다. 하나 더 있다. 영화의 잔향이 생각보다 오래 간다. 마치 도로를 달리다 창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던 어느 시골집의 진한 정취처럼, 영화의 잔향은 어느 한 구석에 있던 어떤 기억들을 살포시 깨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모든 정서를 감싼다. 


나에게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그렇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처음 본 건 <자전거 탄 소년>이었다. 시간이 흘러 잠깐 재상영하는 틈에, 운좋게 티켓을 구해서 좌석에 앉았다. 지독하리만큼 업다운이 없는 영화였다. 그나마 있는 플롯이라고 해도 동기간에 상영되던 어느 상업영화와는 비견도 되지 않을 만큼 조용한 영화였다. 그럼에도 영화관을 나오면서 남은건 묘한 충격이었다. 사실 어떤 충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달 전에 본 영화의 잔향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몇 년 전에 본 영화가 어떤 충격을 줬는지 기억하라는건 나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다. 그저 기억나는건, 그 잔향이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나를 감쌌다는 것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면서, 주목했던 것은 현실에 대한 다르덴의 인식이었다. 해고 대신 보너스를 선택한 동료를 설득해야 하는 산드라의 심정은,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그 누군가의 심정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인간다운 삶을 애써 막는 사회의 비정한 현실 앞에 눈물 흘리는 한 사람의 심정을 기가 막히게 그려냈구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면서는 그 수준까지 다르덴 형제 영화를 읽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언노운걸>은 다르덴 형제의 본질을 조금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게끔 만들어 줄 수 있었던 영화다. 병원이 닫은 후인 밤 8시, 병원의 임시 의사인 제니는 울리는 초인종을 애써 외면한다. 다음 날 경찰이 제니를 찾아와 밤중에 초인종을 누른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얘기를 건네자, 제니는 깊은 충격에 사로잡힌다. 깊은 죄책감, 그리고 안타까움. 제니는 소녀의 묘비라도 세워주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찾기 위한 조사에 나선다.


결국에는 경계에 선 자들의 얘기다. 죄책감을 만회하기 위해, 제니는 현실의 많은 것들을 애써 포기한다. 때론 실시간으로 다가오는 위협에도, 때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착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죽은 소녀의 이름을 알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소녀의 이름을 알고 비석을 세워줘야만 그녀의 경계에서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은 제니는 소녀의 죽음에 큰 책임이 없다. 그저 영업시간이 지났기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 뿐이고, 소녀는 한 번의 노크 후 그 자리를 떠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제니는 죄책감을 말미암아 그녀를 스스로의 경계 위에 올려놨다. 소녀의 이름을 애타게 찾는 행위는,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설정했던 죄책감이라는 경계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최소한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의 산드라도,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도 장르는 다르지만 결국엔 자신들이 설정한 경계 위에서 내려오기 위해 본질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점에서 <언노운걸>의 제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관을 나오며 느끼는 기묘한 감정은 이런 ‘경계’에서 기인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하나의 중심 경계선을 설정해놓고 이를 풀어가며 새로운 몇 개의 경계선을 그려놓고 있다. 중심 경계선 하나야 영화를 진행하며 애써 풀리지만, 그 이후 쌓아지는 몇 개의 경계선은 결국 제대로 풀지 못한채 영화를 끝내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부터 시작되는 잔향은 그런 경계의 잔존에서 나온다. 우리 모두는 사소한 경계 몇 개를 쥐고 살고 있고,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그 경계 위에 서있다. 상황만 다를 뿐 제니가, 산드라가, 시릴이 겪는 경계선 위에서의 갈등은 어느 순간 우리가 지금 삶에서 겪는 각자의 얘기들과 하나로 합치된다. 영화상에서 남은 경계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네 삶 속의 경계선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영화의 느낌이, 우리의 느낌으로 치환되는 상황에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언노운걸>의 제니는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이 설정해놓은 경계선에서 내려오는데 성공한다. 영화관을 나오며, 나를 둘러싼 몇 개의 경계선을 자연스럽게 돌아봤다. 어떤 경계는 나 스스로가 설정해놓은 경계선이었다. 나도 제니처럼, 각고의 노력을 하면 스스로가 설정했던 경계선에서 내려올 수 있을까. 글쎄, 속단하긴 힘들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제니는 실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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