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게매니아 Jul 24. 2017

체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

덩케르크

관객을 쥐고 흔드는 영화가 있다. 덩케르크를 보기 이전까지, 이런 영화에 대한 나의 기억은 ‘위플래쉬’였다. 두 광기가 정면충돌했을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목도하게 될 것인가를,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한, 마지막 장면에서의 캐러밴 연주를 보면서는 숨이 턱하고 막힐 지경이었다. 맙소사,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거지? 연주가 끝나기 직전 앤드류와 플렛처가 시선을 맞교환할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영화는 나를 빨아들였고, 나는 헤어나올 수 없었다. 마지막 10분동안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동안 풀린 다리를 열심히 추스렸던 기억은 남아있다. 그나마 ‘위플래쉬’는 나은 편이다. 관객의 목덜미를 쥐고 흔드는 시간이 마지막 10분에 불과하니까.


‘덩케르크’는 그런 면에서 한 층 더 진일보한 영화다. 1940년, 2차 세계대전 당시 40만 가까이 되는 연합군은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안에서 포위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독일은 덩케르크 해변을 포위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진전을 멈추게 되고(멈춤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그 과정에서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모든 무기를 놓아둔 채 최대 규모의 병력 탈출 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굳이 따지자면 한없이 단순한 이야기인 셈이다.


‘덩케르크’가 차별성을 보이는 부분은 바로 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 있다. 영화는, 핵심적인 이야기의 골자만 남겨둔 채 모든 서사와 스토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철수 작전의 아비규환적 풍경과 생존을 위해 영국군이 벌이는 처절한 사투다. 지극히 일부 분량을 제외하면 적군인 독일군의 모습은 찾을 수도 없다. 106분의 러닝 타임동안, 영화는 스토리와 감정적인 모든 요소를 제외한 채 온전히 상황과 장면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다. 다른 전쟁 영화들이 스토리를 통해 전쟁의 고통에 대한 관객의 응집력을 모으는 것과는 확연히 차별화되는 포인트다.


영화의 극렬한 호불호는 이 포인트에서 정확히 갈리게 된다. 영화에 대해 ‘극호’의 싸인을 날리는 이들은 이 연출적인 방식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게 된다. 처음 총격전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106분이 지나는 순간까지, 그들은 장면과 사운드라는 두 가지 장치에 의해 영화에게 목덜미를 휘어잡히게 된다. 그 순간 관객들이 경험하는 것은 철수 작전의 진정한 참상이다. 아무 서사도 없이, 생존과 치열한 사투를 버리는 연합군들의 경험을 관객은 영화를 통해 본인의 경험으로 치환하게 된다. 그야말로, ‘내가 주인공인지 주인공이 나인지 모를’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이 영화에 ‘극불호’의 싸인을 날리는 이들은, 바로 이 연출적인 방식에 엄지손가락을 땅 끝까지 뻗고 있다. 구성적인 측면부터 스토리와 서사적인 측면 모두, 이 영화는 지나치게 단순한 플롯을 보이고 있다.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연합군이 철수 작전을 진행한다”라는 주어/목적어/술어로 이루어진 이 단순한 문장을 106분동안 늘어지게 봐야하는 것이다. 뭔가는 끊임없이 터지고 시간은 계속 핑핑 도는데, 뭔가 마음이 동하거나 스토리적으로 임팩트있는 포인트는 없다. 그 관점에서, 그들은 ‘덩케르크’를 극불호의 영역에 놓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평을 갈리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는 시간과 공간의 이질적 배치다. 영화는 덩케르크 해안에서의 1주일과 영국과 덩케르크를 잇는 해협에서의 하루, 그리고 그 모든 공간 위 하늘에서의 한 시간을 뒤섞어 배치하고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이 이질감은 전혀 다르게 관객에게 다가온다. 혹자는 신선한 배치를, 혹자는 현기증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배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생각보다 자명하다. 영화의 끝무렵, 뒤섞였던 공간과 시간은 하나의 결론으로 도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관객이 안도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안도감은, 관객에게 불안감의 해소에 따른 카타르시스를 주게 된다.


이 모든 효과를 가장 효율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아이맥스관에서의 관람이다. 영화를 얘기할 때, 일반적으로 특정관에서의 관람을 굳이 추천하지는 않는다. 영화적 몰입감을 어느 정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 것이 영화의 절대적 선택 기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덩케르크’는 다르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아이맥스용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의 분량은 전체의 70%를 상회한다. 시간으로 따지면 75분 이상의 분량을 아이맥스용 필름으로 촬영한 셈이다. 대폭 확장된 화면과 빈틈없는 시선의 확장은, ‘덩케르크’를 보는 관객의 영화적 체험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절대적인 장치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덩케르크’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를 접근하는 방식은, 다른 영화와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 10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을, 감독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촘촘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감독이 관객에게 선사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적 체험의 극대화’다. 다시 말해, 감독은 관객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아닌 영화에 참여하게끔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덩케르크’를 관람한다면, ‘호’냐 ‘불호’냐에 대한 답안은 쉽게 갈리지 않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극을 가린다는 것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