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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게매니아 Apr 28. 2021

종달리를 걷다

우연한 기회가 만들어준 것들

제주도에 놀러 왔다 하니 친한 친구가 종달리를 추천했다. 숙소였던 성산에서 택시로 15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라고도 했다. 두 발과 버스만을 이용할 계획으로 온 여행이었기에 살짝 고민했으나, 마침 3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이 남았던 덕에 계획에 없던 종달리로 향했다.


직접 와보니 종달리는 생각보다 묘한 동네다. 쭉 뻗은 길과 들판이 시원하다가도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아기자기한 느낌이 가득하다. 걷다 보면 창문에 크게 X자가 쳐진 집들이 가득하다가도(아마 이 집에는 더 이상 누군가가 살지 않는다는 뜻 이리라) 봉고 뒷좌석에서 갓 캔 당근을 한 아름 들고 오는 주민들이 보이기도 한다. 골목들은 한없이 조용하지만 그 안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활기찬 곳이기도 하다. 하나의 시골 동네에서 이토록 많은 장면을 볼 수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종달리는 좁지만 넓은 동네이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30분 만에 골목을 모두 돌아볼 수 있지만, 그 골목 하나하나에 있는 가게들에 마음이 가기 시작하면 이틀이 지나도 다 보기 쉽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지도 어플에 떠있던 종달리의 규모만 보고 3시간을 잡은 게 큰 잘못이었다. 카페 모뉴에트에서 1시간 동안 클래식과 김광석을 넘나드는 LP의 기운에 젖다가, 줄어드는 시간에 조급해진 채로 나와 세 평 남짓한 책약방에서 책방지기 Q를 만났다.


Q는 책방지기 n호였다. 무인으로 24시간 운영되는 책약방이지만 가끔 주인이 있을 때 방문한 손님에게는 주인이 책방지기라는 칭호를 내려준다고 했다. 그렇게 임명된 책방지기가 도저히 몇 명인지를 알 방법이 없어 n호라는 순서를 매겼다. Q는 본인도 30분 전에 처음으로 책약방을 방문했다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Q와 나는 30분 정도를 대화했다. 평생을 통틀어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일이다. 평소의 나라면 그런 일을 만들지도, 그런 일이 일어날 여지도 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그곳에서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고, 나는 Q와 생각보다 살가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냥 종달리의 그 책방은 그런 곳이었다.


책방을 나서며, Q와 나는 서로에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또 보자'는 말을 했다. 이건 애초에 이뤄질 수 없는 말이다. Q와 나는 이름도, 나이도, 연락처도 모르는 상태에서 헤어졌기 때문이다. 논리와 이성으로 보면 Q와 나는 다시 만날 일이 없다. 머리 색만 바뀌어도, 아니 코로나19가 끝나서 마스크만 벗어도 우리는 서로를 몰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말을 함으로써, 언젠가 다시 Q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그때의 그 공기와 대화를 기억하는 Q가 어쩌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사는 게 그렇다. 기적이 없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마음 한 켠에는 혹시나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 하나를 안고 살아간다. Q와의 짧은 만남은 그런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한 만남이었다.


후속 일정이 있던 탓에 책약방을 마지막으로 서둘러 종달리를 빠져나왔다. 아직 그림 상점도 못 보고 작은 양조장도 못 보고 당근 주스를 판매한다던 작은 카페도 못 들어갔는데, 나는 종달리를 떠나야만 했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작은 공간들이 종달리에는 가득했다. Q는 종달리에 이틀째 묵고 있다고 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예쁜 곳이라 일정을 급히 변경했다고 한다. 종달리를 떠나며 그 감정에 십분 공감했다. 참으로 묘한 동네라는 말 이외에는 이 곳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매력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제주를 온다면 종달리에만 오롯이 이틀 정도를 할애할 계획이다. 내가 느낀 이 설렘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이 공간에는 적어도 그 이상의 시간을 쏟아야 한다.


다시 오게 된다면, 쭉 뻗은 종달리의 길을 조금 더 오래 걸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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