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게매니아 Dec 28. 2016

용서를 당할 생각이 없다.

아껴 마지않던 어떤 집단을 등진적이 있다. 제 발로 집단을 나갔던 한 인원이 재가입을 신청했고, 그에 따른 문제를 제기했던 상황이었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고, 충분히 합당한 문제 제기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공청회라는 이름 하에 수십명을 모은 자리에서, 그들은 내 의견과 논리가 아닌 메신저 그 자체를 공격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했으니 저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라는 것이 그들의 요지였다. 처음 문제 제기 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몇 가지 사소한 오류를 대대적으로 공격했고, 종래에는 '오프 더 레코드'를 요청했던 발언까지 들먹이며 나라는 인간 자체를 집단 차원에서 상종해서는 안될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는 사실상 내가 가장 아끼던 집단에서 축출되었다.


재미있는 일은 몇 주 후에 일어났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침 다른 스케줄을 소화하던 참이라 전화를 받지 못했다. 스케줄이 끝나고 폰을 확인했더니, 지인에게서 몇 통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스케줄이 끝나는대로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지인에게 연락을 했고, 흥미로운 얘기가 나왔다. 재가입을 신청했던 사람이, 나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다는 의사를 지인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 사람은 지인에게 '속상하게 만든데 대해 얘기도 하고 사과도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가만히 돌이켜봤다. 속상한건 맞았다. 문자 그대로 속이 상하기도 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따른 소화 장애, 우울증, 기타 편두통과 같은 자질구레한 상흔들. 공청회 자리를 거쳐오며,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몇 일을 보냈다. 아껴 마지않던 집단에서 칼을 꽂았고, 아끼던 동생 한 명에게 뒷통수를 맞았다. 상대편의 억측과 모함, 오해석은 나를 집단에서 축출시켰던 가장 큰 공신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이가, 바로 재가입을 신청한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속상하게 만든데 대해 얘기도 하고 사과도 하고 싶다'라는 말을 내가 아닌 내 지인에게 했다. 기분이 묘했다. 그는 아마 나에게 용서를 받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용서란 실은 선인에게 허락된 일종의 아량이었다. 악인이나 죄인이 지은 죄에 대해 '너의 죄를 내가 사하노라', 혹은 '너의 잘못을 웃어 넘기겠노라'라 얘기할 수 있는 일종의 권리였던 셈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선인에게는 잘못이 없고, 악인에게는 잘못이 있다. 악인은 당연히 선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선인의 분이 풀릴 때 까지 어떤 처분이든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악인은 본인의 죄를 선인의 앞에서 고하고 이를 용서받는 것이다. 너의 회개 의지를 내가 받아주겠다. 그러니 앞으로 잘 살도록 하여라. 선인에 있어서 용서란,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최적의 요건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많은 상황에서 용서란 위세나 기세에 기댄 악인의 강요로 이루어진다. 악인은 언제나 선인 앞에 꼿꼿이 서서 "아이, 그래서 나 용서 안할거야? ㅎㅎㅎ" 따위의 말을 내뱉는다. 한 가지 확신 때문이다. 내 위세나 기세가 너에 비해 월등하니, 너는 용서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애석하게도 현대 사회의 악인들은 선인들의 위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은 권력이든 자본이든 본인이 가진 것들을 이용해 선인을 본인의 앞에 무릎 꿇릴 수 있었다. 많은 영화들 속의 히어로는 이 순간 선인의 앞에 나타난다. 그들은 악인을 물리치고, 선인을 애써 일으켜세운 뒤, 선인에게 "우리 사회는 아직 건강하단다!" 류의 멘트를 날리며 멋있게 뒤돌아선다. 그리고 모두가 알듯이-


그런거 없다. 여기는 현실이다.


결국 악인은 선인에게서 용서를 '받아낸다'. 일부 광신도가 결합하면, 이 돼먹지 못한 용서는 하나의 거룩한 과정으로 변화한다. 그들은 항상 얘기한다. '저 것 봐, 악인인줄 알았더니 실은 악인이 아니었잖아! 저 사과는 당연히 받아줘야돼!' 피해자가 상처를 받든, 심지어는 목숨을 잃든, 그건 그들의 알 바가 아니다. 악인은 대부분 선인에게 용서를 강요하고, 동조자들은 이러한 악인의 옆에서 선인들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저 것 봐, 결국 용서도 안하는 쪼잔한 놈이잖아. 저러니까 저렇게 사는거지. 쯧쯧. 용서를 받을 상황이 아니다, 혹은 충분한 사과가 없었다.같은 절절한 말은 철저히 무시된다. 어쨌든 그들은 사과를 던졌고, 선인은 그 것을 받아 용서를 해야 한다. 대다수의 선인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용서를 '당해야만' 했다. 악인들의 용서 요구와 선인들의 용서 당함은,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왔던 하나의 주요한 현상이었다.


'그 사람'의 얘기를 건네 들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와 그의 동조자들이 공청회 자리에서 보인 태도와 언사는 나에게 있어 꽤나 큰 모욕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선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악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서를 구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용서를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 용서를 당할 생각이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먼지털이가 필요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