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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게매니아 Dec 29. 2016

라라랜드, 어쩌면 하나의 절망

라라랜드

다미엔 차젤레로 읽어야 할지, 데이미언 셔젤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두 이름을 적당히 합친 다미엔 셔젤로 읽어야 할지 모를 이 감독을 처음 만났던 건, 대부분이 그러하듯 영화 위플래쉬였다. 어찌 보면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위플래쉬를 봤냐는 얘기를 들었고, 음악이 정말 좋으니 영화관에서 꼭 위플래쉬를 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가끔 맞는 말을 들었음에도 묘하게 낚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위플래쉬를 본 직후가 딱 그랬다. 음악은 확실히 좋았다. 그러나 106분에 걸친 거대한 쇼가 끝나는 순간, 차마 일어설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다'라는 문자 그대로의 느낌을 받았던건, 아마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위플래쉬가 마냥 좋았던 이유는, 단지 영화관을 나서며 다리가 풀리는 경험을 해서만은 아니다. 위플래쉬는 닫힌 결말의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류의 결말이라고도 볼 수 없다. 어찌 됐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플레쳐 교수는 앤드류에게 미소로 보이는 그 어떤 표정를 짓고, 앤드류는 말도 안되게 뻗어나온 그 천재성을 강렬하게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보고, 우리는 수많은 해석을 할 수 있다. 혹자는 결말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적인 해석을, 혹자는 결말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인 해석을 한다. 물론 그 사이의 어떤 해석 역시 존재한다. 결국, 데이미언 셔젤(이렇게 읽기로 하자) 감독은 문을 적당히 열어놓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적 가치에 관한 관객 나름의 고민을 하도록 만들어놓은 셈이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신작인 라라랜드 역시 큰 틀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을 차용했다. 관객이 가장 먼저 인지할 수 있는 라라랜드의 특징은 바로 계절을 차용한 전개의 완결성이다. 겨울-봄-여름-가을-5년 뒤 겨울이라는 계절적 장치를 통해 관객은, 두 주인공의 상황을 직관적으로 만날 수 있다. 장르의 변용은 전작보다 더욱 묘해졌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뮤지컬 영화 속 음악이라면 사랑스럽거나 웅장해야하지 않아?'라는 관객의 관습적 의문을 첫 장면부터 산산조각 내버린다. 뮤지컬 영화와 재즈의 만남은, 신선하면서도 생각보다 아름다운 조합으로 기능한다. 간단한 스핀오프 만으로, 감독은 이전에 나왔던 뮤지컬 영화와 라라랜드간의 차별점을 두게 된 것이다.


정작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내용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의 의견은, 영화를 어디에 맞추고 보냐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두 주인공 간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만을 따라가며 본 이라면, 이 영화는 충분히 멜랑꼴리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화가 될 수 있다. 아름다운 만남과 애틋한 사랑, 현실에 벽에 가로막힌 사랑과 그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미래까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야말로 화룡정점이다. 꿈처럼 펼쳐지는 두 주인공 간의 미래는, 결국 그 것들이 부질없는 꿈임을 얘기하며 사랑에 포커스를 맞춘 관객 모드를 순식간에 현실과 마주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그런 사랑을 해봤고, 그런 상상을 한 번 쯤 해봤으니까. 그리고 때론, 그게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도 너무나 잘 알고있으니까. 그래서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고 라라랜드를 보는 이들은, 영화관을 나오며 멜랑꼴리해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두 주인공의 꿈과 이상에 포커스를 맞추고 보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영화는 사실 절망에 가까운 스토리라 볼 수 있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이들에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결국 사랑과 꿈은 병존할 수 없는 두 개의 개별된 가치인가라는 질문이다. 결국 두 주인공은 꿈을 이루지만, 끝내 사랑을 이루지는 못한다. 심지어는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에 대한 본인들의 감정을 주저하며, 꿈과 사랑 사이에서 결국은 꿈을 택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놓여봤고, 그들에게 마치 감독은 너네가 너무 나이브하다며 꾸짖는듯한 양상 역시 느껴지는 대목이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마지막 시퀀스 직전의 엠마 스톤이다. 감독은, 5년 후라는 과정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채 엠마 스톤이 대스타가 되었다라는 결론만 내려놓는다. 여기서 예리한 관객은 하나의 의문점에 빠진다. 어쩌면 엠마 스톤은 재능만으로 성공한게 아닐 수도 있다. 안정된 경제력을 가진 사람과의 결혼과 이를 통한 배우로의 매진. 결국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구도일 수도 있다. 현실이 뒷받침 되어야 꿈이 이뤄질 수 있고, 그래서 결국 꿈을 이루는 이들은 꽤나 안정적인 환경의 사람인 경우가 많다. 사실 따지고 보면 라이언 고슬링 역시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본인의 꿈을 이루지 않았던가. 결국 이 영화는, 꿈을 포커스에 맞추고 보는 이들에겐 멜랑꼴리를 넘어선 하나의 절망에 가까운 영화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꽤나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적당히 열어놓은 결말로 영화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 타겟이, 이번에는 예술의 가치와 같은 고고한 것이 아닌 우리네 삶을 관통하는 사랑과 꿈에 대한 간극이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며, 수없이 많은 상념과 고민에 휩싸였다. 라라랜드가 마냥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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