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여권이다
때는 느즈막한 오후. 나는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으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툭하더니 투드둑. 소리와 함께 비가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대각선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동시에 신발이 젖지않게 걸음걸이에 신경을 쓰며 빌딩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골목을 나오자마자 도로 중앙에 선로가 보였다. 그리고 한 남자가 거기에 서있었다. 그 남자는 트램을 기다리는 듯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다가오는 트램을 응수하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가오던 트램이 그의 5m 앞에서 섰다.
남자는 제임스 딘처럼 생겼다. 독일 남자들이 진작에 잘 생긴 건 알았지만,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외모었다. 그는 긴 손가락을 사용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기의 냄새가 젖은 공기의 냄새와 뒤섞였다. 실제로는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지만 깊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쩐지 우수에 차 보인다. 순간 그가 내쪽으로 다가온다. 그러더니 날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최대한 어색하지 않으려고 나도 싱긋 웃었다. 그는 내 카메라를 훑어 보며 "라이카 m?"이라고 물었다. 알고보니 그도 라이카 m을 가지고 있었고, 사진의 딜레탕트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우리는 사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정확하게는 카메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장비에 대해 그다지 잘 모르는 나 때문인지, 아님 언어의 장벽때문인지 짧은 대화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어색함의 무게를 감추며 내가 물었다. "근데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니?" 알고 보니 그는 눈 앞에 다가오는 트램의 엔지니어였고 트램에서 승객이 모두 내리길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사진이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허가증이다"
*다이안 아버스는 말했다. 내 경우에 이것을 나의 식대로 느슨하게 풀어보자면, 사진이라는 것은 국가와 국가의 - 집단과 개인을 -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일종의 여권이 아닐까란 생각이다. 사진이야 말로 탄생 이후로 줄곧 여행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내 쪽에서는 여행의 기술을 들먹일 재주는 없지만, 여행을 증명하는 것 같은 목적으로서 사진은 그 스스로가 제 몫을 톡톡히 한다는 생각이다. 다녀간 그곳에서 마치 전리품처럼 사진을 찍어 모아 오는 행위를 하면서 우리는 여행을 하고 사진을 통해 여행을 음미하는 것이 아닐까.
덧붙이자면 아마도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맵시 있는 소형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덕분 - 인스타그램은 축복이다 - 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실적인 경험을 이러저러하게 했다. 라는 것을 뛰어넘게 되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과 세계와의 독특한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 사진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얼핏 보기에 사진은 쉬운 작업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으쓱거릴만한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스마트폰으로도 슥. 꺼내 툭. 찍으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사진은, 사진을 찍는 이들이 사용하는 카메라 즉, 장비라는 공통적인 아이템을 제외하면 공통분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사진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여행하고 그것을 이해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권이 아닐까.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 1923년 3월 14일 - 1971년 7월 26일)는 미국의 사진작가이다. 초기에는 상업사진을, 훗날에는 초현실적이고 남다른 사람들의 초상을 많이 찍었으며, '괴짜를 찍은 사진작가'로 흔히 알려져 있다.
Germany | Berlin | 2016 | ©Hyunw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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