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달리기는 몰입의 운동이다.
내 경우는 음악 없이 달리기를 하다 보니, 덕분에 달리면서 생각을 많이 한다. 고백하건대, 대부분의 생각은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아 어쩐지 오늘 밤은 레드 와인이 마시고 싶은데, 오린 스위프트의 빠삐옹을 마실까? 아니다. 셀러에 고작 한 병 밖에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좀 더 저렴한 8 Years in the Desert를 마실까? 아님 그냥 데일리 와인 중 하나를 꺼낼까? 까쇼를 마실까? 진판델을 마실까? 진판델은 고기와 먹으면 맛있는데, 고기도 같이 먹을까? 그럼 아내한테 말해볼까? 오늘 저녁은 진판델과 고기를 먹자고. 와 같이 생각이 한번 시작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오늘 점심은 햄버거에 맥주가 먹고 싶은데. 집 근처에 맛이 훌륭한 패티 앤 배지스가 있어서 산보할 겸 걸어서 가볼까. 아님 딜리버리로 먹을까. 아 거기 패티는 우리 가족이 다 좋아하지만, 특히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바닐라쉐이크가 없지. 그럼 브루클린에 가서 치즈 버거를 먹어야 하나? 아니다 브루클린은 배달로 시켜먹는게 좋아. 라는 아주 사소한 생각들이 달리는 도중에 펼쳐진다.
아무런 생각을 하기 싫어서 달리기를 하던 시절, 홀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공백이 주는 의미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별로 없는 시간을 찾았고, 조용한 무드 속 세상에서 한 발 물려나 이 고요하고 아늑한 나만의 공간에서 고독을 느끼며 달리기의 의미를 찾았다. 거창하게 말하면 내 쪽에서의 달리기는 공백을 느끼며 고독을 찾는 것이었다.
주기적으로 달린 지 1년이 지나면서부터 달리기라는 행위는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달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면 왠지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오늘 뭐 먹지?라는 사소한 물음에서부터 얼마 전 감명 깊게 본 영화나 책, 혹은 아이들의 미래, 우리 가족의 행복 등 다양한 주제들도 펼쳐진다. 다만 여기에는 몸의 컨디션이 좋아야 하는 조건이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계속해서 고관절과 발등, 혹은 근육에 신경을 쓰면서 달리니까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아침 루틴인 소박하고 건강한 달리기를 통해 나의 하루를 컨트롤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조금씩 쌓이며 일상이 되었고, 나의 정체성을 만들고 내 삶을 컨트롤하게 되었다.
어느덧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 차로 접어들었다. 여름이 되자, 기온이 한없이 올라가면서 무엇보다도 습도가 얄미울 정도로 버티기가 버거워졌다. 코 끝이 시릴 정도로 추웠지만 신선하고 고즈넉한 겨울의 아침 공기가 벌써부터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