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의 멘토는 누구일까?
우리의 인생은 아주 긴 세월인 것 같지만 먹고 자고 배설하는 생체적으로 필요한 시간과 그냥 멍하게 허송세월을 하고, 아프고 방황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사용하는 시간은 너무나 짧다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젊은 날의 방황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인생의 의미와 원칙과 가치관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야 말로 우리의 멘토라고 할 수 있다.
위키 백과사전에 의하면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용어로‘가르침을 주는 훌륭한 선생’을 의미한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출정하며 아들 텔레마코스를 절친한 친구인 멘토르에게 맡겼다. 그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아들의 친구, 선생, 조언자, 아버지 역할을 하며 잘 돌봐주었다. 그 후로 멘토는 지혜와 신뢰로 인생을 이끌어주는 지도자라는 의미를 뜻하게 됐다.
우리에게 멘토가 언제 왜 필요한 것인가? 어린 시절에는 멘토 보다는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부모가 필요로 하다. 특히 30대에 자신의 일과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할 때 멘토의 만남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며 방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멘토의 조건은 조금 까다로울 수 있다. 멘토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비범한 사람들 이어야 하며, 멘토는 최소한 비겁한 삶을 살거나 자기 정체성이 없거나 혼란한 사람일 수 없다.
특히 자신 아버지의 경우 어린 시절에는 멘토 일 수 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 왜냐하면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중년은 비겁하거나 무능력하고 원칙이나 정체성 없이 평범하게 사는 모습에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충분히 성공하지 못한 삶처럼 보일 수 도 있다. 멘토는 평범 속에 비범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멘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네 명의 멘토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을 하면서 만났다. 내가 왜 그 당시의 그 분들을 나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멘토라고 말하는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나이를 들수록 그분들이 나의 멘토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여도 이상한 것은 내가 왜 한국에서는 멘토를 발견하지 못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는 아직도 멘토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멘토가 없는 사회 일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우리의 인생에서 괜찮은 선생님도 많이 있지만 멘토 또는 스승이라고 부를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멘토를 만들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일까? 모두 바빠서 충분히 서로 교감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선생님이 너무 많은 학생을 관리하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한국사회의 교육이란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이름있는 학교나 이름 있는 직장에 들어가거나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지위에 오르는 개인의 영달이나 입신양명이 목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성공과 생존을 하기 위한 사회에서는 멘토가 있을 공간은 없다.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암기하거나 수학문제를 하나 더 풀어야 하는 교육만이 존재한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서로 만나서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교감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다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난 수 십 년간의 교육은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에 대해서 준비하였지 인성교육은 거의 없었다. 나이를 들어서 보니 자기 주위에는 인생에 대해서 배울만한 조언자나 멘토가 없으며 쓸모 없는 졸업장, 자격증, 영어점수에 인생을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와서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아직 멘토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는 없지만 네 분의 멘토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첫 번째 멘토는 프리즈 박사라는 분이었다. 미국의 중부의 전형적인 할아버지로 그분은 나를 아들처럼 대하여 주었다. 대학교 학장으로 매우 검소하게 사셨으며, 항상 친절하게 웃지만 이성적이고 냉철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비즈니스에 대한 다양한 독서를 많이 하시는 분이었는데 내가 그분에 방에 자주 찾아가서 대화를 많이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이분은 자주 나에게 자신이 어린 시절 자신의 미국 공황 때 당한 고통을 이야기 하여 주셨다. 자신의 아버지는 작은 농장을 경영하다가 미국 공황시절 무능하여서 농장을 잃어 버려서 많은 형제들은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던 기억 때문에 자수성가를 한 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원칙에 대해서 절대 타협하지 않으시는 강직한 분이었으며 비겁하지 않으며 용감하게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극복하시는 분이었다.
특히 이분은 학생의 과제를 모두 꼼꼼히 읽고서 절차가 틀린 부분을 빨간 펜으로 고쳐 주셨는데 2개 까지는 봐주었고 3개 이상이면 점수를 한 단계로 낮추어서 주었다. 그분의 원칙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철자 오류는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포함한 외국학생들에게는 악몽이었고 심지어 미국학생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무리 수십 번을 검토해서 20페이지 정도의 과제에서 사소한 절차 오류를 근절하기가 정말 힘들어서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다. 외국학생들은 외국인 것을 내세워서 불평을 하였지만 미국학생이나 외국학생이나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였다. 나중에 졸업한 다음에 찾아가서 왜 이렇게 엄격하게 하였는지를 물어 본적도 있다.
이분은 문서는 영원히 남는 것이므로 철자 오류에 대해서 완벽하여야 하며 이것으로 인해서 인생에서 손해를 많이 보기 때문에 학생시절에 잘못된 습관을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 분은 철자 오류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주의자이었다.
몇 년 후 내가 관리자로써 여러 사람들의 이력서를 받아서 사람을 뽑을 기회가 생겼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력서를 냈는데 너무 많아서 일단 추려야 하였다. 그런데 절차오류가 있는 이력서를 보니 그 사람에 대해서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력서에 절차오류가 많은 신청자들을 제외하고 읽었다. 그러면서 이 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어서 전화를 걸어서 고맙다고 말씀 드렸던 기억이 있었다. 어찌하였던 이 분은 나의 첫 번째 멘토라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그분에게서 인내, 공정, 원칙, 당당함을 배웠다.
두 번째 멘토는 다다시 교수라는 분인데, 그는 이란태생으로 메세추세스 대학에서 전산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비교적 젊었으며, 예의를 중시하였는데 학생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수업은 너무 힘들었는데, 우선 대학원에서 시험을 보고 최고 점수와 최하 점수를 빼고 나머지를 평균하여서 평균점수가 B 마이너스였다. 이것은 대학원생들에게는 너무 가혹하였는데, 이 분에게 c학점 두 번 받고 고향으로 돌아간 중국학생도 직접 보았다.
이분의 시험은 조금 특이하였는데 마감이 없다는 것이다. 아침에 시작하여서 마지막 학생이 끝난 다음에 시험지를 모아서 제출하는 것인데 다음날에 와서 다 쓸 때까지 계속 시험을 봐도 되었다.
이분은 그 동네에서 데이터베이스 설계에 독보적인 존재로 존경 받았는데, 많은 학생들이 이 사람의 과목을 들을 때에는 과목을 최소화해야 소화할 정도로 숙제와 시험을 많이 내 주웠는데 너무 공부를 많이 시키고 점수도 잘 주지 않았지만 존경과 카리스마의 대상이었다.
이분의 수업은 힘들었지만 추천서는 취직의 지름길이었는데, 몇 년 후 추천서를 받으러 갔는데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러면서 자신은 평생에 자신의 수업에서 A학점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너무 존경스러워 보였다. 나는 이분에게서 데이터베이스 설계, 분석, 전문지식, 실용성, 학문에 대한 열정을 배웠다
세 번째는 이분 역시 이란사람이었다. 오클라마호마 대학에서 행정학을 하시고 대학원 학장을 하셨는데, 수완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약간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사업도 항상 긍정적이고 정렬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외국인으로 미국에서 잘 살아 남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실질적으로 가장 영향을 많이 주었지만 내가 추구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분을 처음에는 나의 멘토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나이를 먹고 지혜가 생기면서, 나는 자신 있게 이분도 나의 멘토라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각성할 수 있게 해 주신 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나는 이분에게서 추진력, 긍정적 사고방식, 일에 대한 정열과 도전의식을 배웠다.
또한 여러 가지 수혜적인 것을 제일 많이 주신 분이다. 다른 세 분과 다르게 현실적이고 목표에 대한 실행력이 최고이신 분이다. 그는 이상적이거나 고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목표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았으며 미국에서 중동인으로 살아 가고 있지만 열등감이나 좌절하지 않고 능력하고 긍정적인 면이 나를 감동시켰다. 인생 생활에서 가장 영향력을 주신 분으로 기억 될 수 있다.
네 번째는 브라운 박사라는 분인데, 가장 짧게 만났다. 이분을 만날 때 거의 은퇴하시는 해였다. 나이에 비해서 매우 자유로운 생각을 하였고 날카롭고 참신한 발상이 나를 매료 시켜서 정말 재미있게 수업을 하였고 점수도 잘 주셨다.
나는 이분에게서 자유로운 생각, 즐겁게 생각하기, 창조적인 발상, 비즈니스 학문을 배웠다. 특히 비즈니스적인 마인드에 대해서 부족하였던 그 당시 나로써는 새로운 세계를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서로 대화를 많이 즐겼다고 할 수 있다.
한번은 비즈니스 이미지에 대해서 강의를 들었는데 항상 토론 방식이었다. 이날의 토론은 이미지가 한번 고착되면 변경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였는데 그분은 현답을 주셨다. 나의 질문은 고착된 이미지를 바꿀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그 분의 현답은 항상 Yes and No! 라고 하시면서 거의 불가능하지만 가능은 하다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고착 되어서 바꾸는데 엄청난 비용이 든다고 하시고 최초의 비즈니스 이미지를 바꾼 사람은 록펠러 일가라고 하셨다. 록펠러 일세는 그 당시 최악의 악독 기업가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많은 광산에서 착취가 심해서 노동자들이 끊임 없이 투쟁하였고 죽은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록펠러는 이러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비즈니스 전문가를 고용해서 수 십 년 동안 엄청난 비용을 들었다고 한다. 이제 전세계에서 사람들은 록펠러가가 자선사업가라는 이미지를 가진다. 그러나 그 가족에게 피해를 본 사람들은 평생 동안 이미지를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 한 대목이다.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앞에 두 분은 약간 비관적이며, 논리적이었다. 약간 독선적이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원칙을 강요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분은 낙천적이고 감성적이며, 인생을 즐기려고 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하시는 분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두 분에게 조금 더 정이 많이 가고 있었다.
멘토는 친절하고 더 많이 들어 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결론적으로 앞에 두 분은 차가운 이성적인 멘토이었고 나머지 두 분은 따듯한 감성적인 멘토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 분 모두 나를 인정해 주시고 긍정적으로 대해서 주셔서 나의 인생에 멘토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멘토의 가장 큰 특성은 평범한 것 같지만 비범한 분이라는 것이며, 나름대로 원칙과 고집 그리고 사회적으로 전문성과 성공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멘토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결정하던 우리의 의식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인생에서 우리가 비겁해 지려고 할 때 원칙과 소신에 대해서 당당할 수 있게 해주며, 방황하면서 시간을 소모할 때 나를 각성하게 해준다. 조금 지식이 있다고 자만할 때에는 겸손함을 좌절할 때는 용기를 준다.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의 네 분의 멘토가 내가 죽는 날 까지 가슴속에 존재할 것이다. 힘들었던 이국 생활이지만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이 분들은 나의 삶은 매우 풍부하게 만들어 주셔서 행복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도 여러분들이 인생이 멘토가 없다면 빨리 찾아야 할 것이다. 멘토가 없는 인생은 너무 쓸쓸하고 아쉬운 인생이 아닐까?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왜냐하면 인생이란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벤자민 프랭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