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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백 Sep 19. 2023

05. 태어나서 처음 한 수술

그게 유산이라니

수술이 끝나고 눈을 떴더니 시베리아에 온 듯한 추위가 닥쳐왔다.

수술 부위의 통증도 통증이지만 너무 추워서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였다.

-추...추워...아파...

전신 마취 중에 당한(?)거라 몰랐는데  옆구리에는 피주머니, 아래에는 소변줄이 달려있었고 기저귀도 차고 있었다.


그뿐 일까.

배는 수술용 가스를 채워 올챙이처럼 빵빵했고,  목은 마취 때문에 쉬어서 목감기 걸린 듯 허스키한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수술도 입원도 태어나서 처음.

만 35세가 되는 동안 남들 다 하나씩은 있는 알레르기, 멀미, 새치 하나 없고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장수 DNA를 물려받은 것이 부모님의 기쁨이자 나의 자랑이었는데 견고했던 나의 건강부심이 와장창 무너진 순간이었다.


수술 전엔 유산의 충격에 슬펐는데 수술 때 생물시간 해부용 개구리처럼 팔다리가 묶이던 순간이나, 수술 후 용변도 내 맘대로 못 가리는 이 상황이 더 큰 충격이었고 수치심까지 들었다.

하루빨리 저 소변줄도 피주머니도 기저귀도 다 떼 내고 마음대로 거동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건강 없이 인간의 존엄성은 없구나'

당연한 사실을 직접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하지만 수치심도 잠시, 추위에 부들부들 떠는 내게 남편이 이불을 덮어주고 마취가 풀리자 너무나도 생경한 고통이 닥쳐왔다.


내가 한 수술은 복강경 수술이라 배꼽 포함 세 군데 구멍을 내서 배에 가스를 넣어 부풀려서 하는 수술이었는데, 배가 다 헤집어진 느낌이라 처음엔 할복의 고통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였다.

간호사 선생님이 아프면 누르라던 무통약 버튼만 연타하며 고통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나의 구세주 무통약

수술 후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여전히 고통에 낑낑거리고 있으니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수술 경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 오른쪽 나팔관은 이미 복강 내에서 터져서 피떡이 져 있었다고 했다.

병원에 오지 않았다면 정말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던 거라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은 수술이 잘 되었으니 이제 3박 4일 입원하며 회복하면 되고 내일 처치할 때 또 보자며 나팔관 하나가 없어도 또 임신할 수 있으니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을 하시곤 가운을 휘날리며 사라지셨다.


그리고 간호사가 남아서 피검사 결과 6주 정도 되는 임신수치라고, 임신 관련 수술은 실비 지원은 안되고 임신바우처가 나오니 병원비에 100만 원 임신바우처를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수술을 안 하면 죽을 뻔했는데 실비 지원이 안 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실비보험은 정형외과 도수치료는 지원해 줘도 산모가 사망할 수도 있는 유산 관련 수술에는 지원을  해주는 게 현실이었다.

100만 원 바우처는 국민행복카드로 나온다.

임신은 끝났는데 병원비를 위해 임신바우처신청을 하려니 씁쓸한 마음만 가득했다.  

자궁 외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이 금액은 아기용품을 사는 데 썼겠지...


임신에 기뻐하던 지난 주말은 다 신기루 같았다.

잉태의 기쁨은 이틀밖에 못 누렸는데 고통은 길었다.

통증이 진통제 영향으로 줄어 들 때면 슬픔과 허망함이 머리에 가득 찼다.

그렇게 마음속에선 폭풍우가 일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뇌에선 상황 파악이 아직 덜 된 건지 눈물은 전혀 나지 않았다.

남편에게 울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하지만 정말 힘든 상황은 통증이나 수치심이 아니라 병실에서 일어났다.  

커튼 너머에 있는 산모의 세상

첫째 날은 1인실이 없어서 6인실에 입원을 했는데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해산한 산모였던 것이 고역이었다. 때때로 간호사들이 들어와서 혈압을 재며 산모들에게 ♡♡이 어머니~하면서 아기 상태도 알려주고 퇴원하면 가게 될 조리원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내 자리까지 너무도 잘 들렸다.


아무리 내가 감정이 메마른 극 T형 인간이라지만...

수술 첫날이라 통증도 심하고 금식도 하고 있을 때 출산한 사람과 같은 병실을 쓰며  피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서 아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마치 고문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3박 4일 있다간 없는 정신병도 새로 생길 지경이었다. 


그들은 산모, 나는 환자.


1인실은 보험이 안되어서 비용이 거의 10배였지만 그 상황에서는 20배라도 내고 옮기고 싶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2일 차부터는 1인실에 자리가 나서 바로 옮겼고 소변줄도 빼고 컨디션도 훨씬 좋아졌다. 창도 크고 보호자 자리도 편하게 나와서 남편도 병실에서 편히 자게 할 수 있어서 맘이 덜 불편했다.


1인실은 천국이었다

안정을 찾은 뒤, 하루 종일 누워있다 보니 생각을 할 시간도 많았는데 가장 머릿속을 지배했던 건 왜? 였다.


왜 내가 하필이면 자궁외임신이 된걸까? 왜 수술까지 하게 된 걸까?


상황에 대해 감정적으로 받아들였던 처음과 다르게 다시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 노력해 봤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쉽게 하는 임신이라 임신과 아이에 대해 가볍게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 네게 올 아이를 좀 더 소중히 여기라는 하나님의 뜻일까?


-그대로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탔다면, 나는 비행기에서 배를 잡고 뒹굴다가 복강 내 과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겠지?  (사망엔딩)


-미국에서 수술을 했다면, 차를 팔거나 대출을 내서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내야 했겠지?(빚쟁이엔딩)


-그래도 수정과 착상까지 된 걸 보니 희망적으로 봐야 하나? 수정조차 못할정도는 아니구나.(불임엔딩)


이 불행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부분이 찾아지기는 했다. 그것조차도 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를 상상하는것 뿐이었지만 .


병원밥이 산후보양식이라 밥은 참 잘 나왔다.


2일 차 저녁부터 일반식을 먹을 수 있었고, 안정을 찾으니 그간 수동적이었던 방식을 벗어나 이제는 수술까지 했는데  임신을 위해서 좀 능동적으로 움직여야겠다고 마음이 바뀌었다.

빨리 회복해서 다시 임신하자!

많이 걸어야 빨리 회복이 된다고 해서 계속해서 걸었고 병원밥이 잘 나와서 밥도 맛있게 잘 먹었다.


하루하루 몸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지자 기분도 좋아졌다.

수술하고 나면 자궁이 깨끗해져서 임신 확률이 올라간다는 미신 같은 말이 힘이 되어줬다. 그렇게 나머지 기간 동안 무사히 회복하고 퇴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임신할 수 있다는 희망 덕인지 막상 입원한 기간 동안은 심리적으로 힘든 것이 크지 않았는데,

통증이 사라지자 미처 돌보지 못했던 마음에 후폭풍이 닥쳐왔다.

배에 스테이플러로 찍힌듯한 수술자국이 수술 3주가 지났는데도 다시 올라오지 않았고 부풀어 오른 배는 살이 되어버린 건지 여전히 미세하게 올챙이처럼 나와 있었다.  달이 지나자 흉터를 제외하고 몸매는 수술 전으로 돌아갔지만 내 몸을 볼 때마다 아이는 없고 상처만 남은 배가 보기 싫고 슬펐다.


이 슬픔의 치유방법은 임신밖에 없었다.


 인생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로 올라선 임신때문에 이직도, 배우고 싶었던  운동도, 여행도 무기한으로 미뤘다. 항상 다음달 임신이 된다면, 하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인생 계획을 세웠다.

생리 두 번 후 아이를 준비하면 된다고 해서  생리가 끝나자마자 병원을 다니며 준비했고 4 자연시도 5 배란 초음파, 6월과 7월은  과배란제를 먹고 임신을 시도했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어느새 수술했던 추웠던 겨울이 지나 계절이 두 번 바뀐 여름이 되었다.

임테기는 매직아이로도 보이지 않는 한 줄 뿐이었고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과배란 약

 

페마라라는 호르몬제를 먹기 시작하며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부작용 때문인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계속 나고 하필이면 주변에 임신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렸다.

딩크로 살아도 된다던 여유 만만한 나는 온데간데 없고, 번식 대한 원초적 본능인지 아니면 아팠던 것에 대한 보상 심리인지 알  없을 절박함에 이리저리 휘둘리기 시작했다.

아이도 품지 못하는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너무 불행했다.

느 순간 이 상황이 너무 숨이 막혔다.


눈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흘렸다.

길 가다가도 울고 일하다가도 울었다.


내가 유산한 것을 모르는 지인이 한방에 임신했다며 축하해 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입으로는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맘속엔 억울함과 미움이 피어났다.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집밥도 안 해 먹고 패스트푸드 매니아에 술도 영업사원 마냥 많이 마시는데 인생이 다 편하고 쉬운지.

나는 왜 작은 것 하나도 그저 오는 것이 없는지, 있는 장기마저 빼앗아 가는 하늘에 묻고 싶었다.


길거리 다니는 임산부들을 보기 싫고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는 아이들도 피하게 됐다.


오라는 아이 대신 우울증이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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