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위에는 수줍게 미소 짓는 소녀가 있었다
4월 어느 날, 엄마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할아버지 건강이 요즘 안 좋으시다네, 집에 한 번 가봐야 하는데..."
"이번 어버이날 때 가자. 이제는 엄마 스스로 차 끌고 가봐야지. 내가 같이 갈게."
서울길 운전이 두려워 늘 아빠가 있어야 친정에 갈 수 있었던 엄마는 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친정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몇 달은 장을 보지 않아도 끄떡없을 먹거리, 생필품과 함께 외할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남편 없이 딸과 둘이 가는 것이니 맘 편히 친정에 보내줄 것들을 준비할 수 있었다.
차에 한가득 실어 넣은 뒤 서울길에 올랐고, 우리는 안전하고 빠르게 무사히 외할머니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반갑게 맞이해주시다가 쉬지 않고 차에서 나오는 짐들에 이게 다 뭐냐며 놀라셨다.
기쁘게 받으시면서도 친정에 너무 많이 가져다 주니 시댁에 눈치 보인다며 엄마와 몇 번이나 실랑이를 벌이셨다.
시댁은 자주 찾아뵙냐, 시어머니나 드리라며 나이 60을 바라보는 딸이 아직도 시댁에 밉보일까 걱정이신 것이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우리도 가야겠다 엄마."
"그래 이제 가봐."
떠날 채비를 하려고 일어나던 찰나, 작은방 문 틈 사이로 앨범 같은 것이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언젠가 엄마에게 엄마는 시집오기 전에 찍어둔 사진이 없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아빠의 10대 시절 앨범들은 집에 있었지만 엄마의 앨범은 하나도 없었고, 찾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 외갓집에 있을 거라며 엄마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었다.
"저거 앨범 아니야? 할머니 저거 졸업앨범이죠?"
집으로 가려고 나서던 엄마를 붙잡고 작은방에 들어가니 엄마의 중학교 졸업앨범과 고등학교 졸업앨범이 있었다.
"어머 이게 여기 있었네. 몇 반이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나는 엄마의 이름을 찾으며 엄마와 닮은 10대 소녀를 찾기 바빴다. 행여나 40년 전 엄마를 못 알아볼까 봐 이름 위주로 찾았다.
"찾았다!!"
몇 번이나 앨범을 다시 넘기며 찾은 엄마의 이름. 그 위에는 수줍게 미소 짓는 소녀가 있었다.
남학생처럼 짧게 자른 숏컷에 젖살이 남아있는 소녀의 모습. 40년 만에 보게 된 자신의 졸업사진에 엄마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머리는 왜 이렇게 잘랐냐고 하니, 두발 자유화가 그때 막 시작되어서 홧김에 숏컷을 했더란다.
엄마는 추억에 젖어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보여주며 학창 시절 에피소드를 늘어놓았고, 그런 엄마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번져있었다.
우리는 앨범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고 아빠의 앨범 옆에 나란히 꽂아두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수줍게 웃고 있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 신기하면서도 미안한 감정이 가득 밀려왔다.
그건 아마도 아무렇지 않게 잊고 살아온 날을 마주해서였으리라.
누구도 찾지 않았지만 홀로 밝게 빛나던, 엄마의 소중한 젊은 날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