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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혜 / 높고 낯선 담장 속으로

by Jin
『높고 낯선 담장 속으로』


저자 조은혜

출판 책과이음

발매 2025.08.30.



[나의 평]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전부였을까.

당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정말 다일까.

사회가 정한 ‘미친 사람’의 기준은 무엇일까.

높고 낯선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과연 내 일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책 내용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글 중간 네모 박스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 자라지 못한 모성 p44~


"여자 수용동에 언론 보도자가 한 명 들어왔습니다. 신변을 비관해서 혹시나 극단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 같은 게 없는지, 일일 중점 관찰 대상자로 지정해야 할지 좀 잘 살펴봐 주세요. 상담하고 나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 박은수는 둔한 몸을 이끌고 쭈뼛쭈뼛 상담실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 허망했다. '교도소'라는 곳이 무서워서 주눅이 든다고 말한 그녀는 아이와 관련해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삼촌이 보고 싶다며 무작정 울었다.... 박은수는 같은 말을 천천히 여러 차례 반복하고 설명해줘야 할 만큼 이해력이 부족했다.


... 그랬다. 박은수는 지적장애자였다. 그런데 어떤 범죄 사건이 정신질환과 관련이 있을 때마다 지나칠 정도로 그 사실을 강조해 언급해 오던 언론에서 이번엔 왜 박은수의 지능 수준에 대해서 일언반두도 내뱉지 않았을까.


... '가해자의 서사'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슬로건은 범죄자의 개인사가 사건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의미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 나로서는 이 구호가 목에 걸렸다. 마치 사회 정희 실현에 반동적인 행위를 하는 악의 동조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박은수에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서사를 대면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십 대 때 겪은 두 차례의 성폭력, 원가족의 부재, 폭력적인 현재의 남편, 그리고 지적장애.. 그녀의 삶을 수식하는 단편적인 기록들이 과연 이 끔찍한 사건과 무고한 것인지 알아야 했다.


문득 병원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한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예쁜 교복을 입었을 아이는 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매달 찾아오는 생리혈을 처리하지 못해 엉덩이 부분이 붉게 젖어있기 십상이었다. 아이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성폭력을 당한 뒤 낙태를 한 경험까지 있었기에 우리는 자궁절제술을 진행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고민해 보았다.


... 아주 기본적인 자기 관리조차 되지 않았고, 어떤 폭력 앞에서도 속수무책이었으므로, 병원에서 나간다면 또다시 누군가의 성욕 해소를 위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성범죄 대상이 되어 임신과 낙태 혹은 추락으로 이어질 예견되는 불행이 그녀의 일생이었다.


... 박은수는 그때 만난 아이에 비하면 꽤 인간적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여성'으로서 당하는 피해 면에서는 정확히 그 아이를 연상시켰다... 무엇보다 자신의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현재의 동거남을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감정을 아무리 애써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죽은 아기는 박은수에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처럼 느껴졌다. 지적장애라는 것이 모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걸까?



자라지 못한 모성이 파트를 읽으며 아주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 글과 관계가 없을 수 있지만, 나는 그랬다. 수 십 년이 지금도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날. 친구 집 거실 창은 컸지만, 주변 건물들에 가려져 햇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던 그 거실의 한가운데에서 친구 어머니는 냉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남자는 생활비를 가져다주고, 그 생활비를 받고 생활하는 여자는 그 대가로 남자가 원하면 당연히 성관계를 해줘야 한다고.

그 이야기는 나에게 꽤나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당시 옷을 전부 벗은 채 친구의 어머니 앞에 선 기분이었다. 예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강렬히 각인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남성의 성욕 해소를 위해 존재할 수도 있는 여성' 임을. 그리고 몹시 불쾌해져 '성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했다. 나는 친구의 어머니를 가끔 떠올리면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토록 중요한지도 모르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박은수에게도 제대로 된 주변 사람이 있었다면, 작가님이 병원에서 만난 여자아이에게 제대로 된 주변 사람이 있었다면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니었을까. 나 역시 아트 테라피 선생님으로 활동할 때 아무 곳에서나 치마를 올렸던 여학생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제대로 된 사람을 하나쯤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오랫동안 이 이야기가 나에게 남을 것임을 나는 예견했다.



>> 당신의 감정은 옳다. p118~


상담하는 동안 그녀가 울지 않은 날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울음의 세기와 강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알아차리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연습은 그녀의 평생 숙제가 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마음껏 슬퍼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 아이가 걱정되는 마음에 대해서, 몇 년간 기른 아이를 잃은 슬픔에 대해서. 그리고 마음껏 분노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결혼에 대한 최소한 책임도 지지 않는 남편에 대해서,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에게 몹쓸 말을 한 시어머니에 대해서.


나는 문득문득 생각한다. 오은지가 그 순간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술을 대신해 위로를 건네줄 단 '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왜 기진맥진할 때까지 슬픔의 진통을 혼자서만 겪어내고 있었을까.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의 날을 상상하며 질문을 던질수록 구름 속에 갇힌 듯 답답해졌다.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웃어야 했던 오은지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까닭이다. "네가 그 모양이니까 남편이 바람나는 거야"라는 시어머니의 이상한 논리와 "네가 참는 것이 미덕이다"라는 친정 엄마의 폭력적인 가르침은 언젠가 읽은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연상시켰다.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좋은 게 좋다'라는 가스라이팅은 세상만사 빽빽하게 따지고 들 생각 말고 모르는 척 눈감고 살라고 강요한다. 일상에 교묘하게 파고들어 개인이 느끼는 힘겨움과 부당함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 사회적 압박의 희생자가 오은지를 포함한 우리 모두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혀온다.... 존중받지 못한 감정이 극단의 공격성을 야기할 수도 있는 우울증이 될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 가해자는 없다. 단지, 감정의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의 피해자만 있을 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의 브런치북 『새댁. 애가 하나뿐이오?』가 떠올랐다. 그 소개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난임과 절망은 하나의 묶음 같았다. 그 안에는 단순한 아픔을 넘어선 복잡한 감정들, 사회 구조, 내면의 갈등이 얽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라고 해 놓은 것처럼 ‘결혼한 여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했을 때 늘 낙오한 사람처럼 느꼈다. 정확히는 사회가 그렇게 느끼했다.

나는 다행히도 '오은지'와 달리 술 대신 위로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결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사람을 만났기에 수많은 충동과 갈등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었다. ‘좋은 게 좋다’라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나를 지지해 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오은지'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타인을 파괴하는 일은 결국 나를 파괴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위로를 건네어 준 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다.




높고 낯선 담장 속으로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님이 글에서 언급했던 '가해자의 서사'라는 단어를 입에 넣고 굴렸다. 그들의 죄에 대해 옹호하거나 정당화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라지 못한 모성과 당신의 감정을 옳다.>에서 나오는 '박은수'와 '오은지'는 그녀들의 주변에 제대로 된 사람들이 없었기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을까?라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내 주변에 제대로 된 사람들이 없었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파괴하며 나를 지키며 살 아 갈 수 있는 환경이 없었더라면 나 역시 제2의 오은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높고 낯선 담장 속으로』이 책은 브런치에서 우연히 넘실대는 파도를 타고 들어가게 된 작가, 엘엘리온 님의 책이다. 평소 관계 속 심리에 관심이 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책을 구매해 읽어보았다. 이 책을 읽으며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있던 부분에 대해 많은 정리를 해 볼 수 있었다. 높고 낯선 담장 안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추천드리는 책이다.


https://brunch.co.kr/@a341a7170be0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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