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장의 추리노트
내 직업은 작은 헌책방의 주인이다. 표면적으로는 일단 그렇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고책을 사고파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책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김수영 시인이 오래전에 쓴 것처럼 “잠자는 책은 이미 잊어버린 책”이다. 그 책을 깨우는 사람만이 진짜 책 속의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 잠들어 있는 책을 깨워 그 속에 깃든 무한한 힘을 찾아낸다. 그게 바로 진짜 내가 하는 일이다.
표지는 많이 봐온 책인데 '기담'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선뜻 읽어볼 생각까지는 하지 않던 책이다. 이번에 기회가 닿아 조금 더 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다 보니 '기담'이 기괴한 이야기라기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리얼리티 다큐멘터리처럼 드라마는 아니지만 오히려 드라마틱한 이야기임을 알게 되었다. 책의 저자는 윤성식 님인데 역시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방문하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장 아니던가.
저자는 중고책을 찾는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이른바 '책탐정'이다. 책을 찾아준 대가로 수고비를 받기 애매하다 보니 대신 그 책을 찾는 이유, 책과 연관된 의뢰인의 사연을 책값 대신 받게 되고, 그 이야기를 모은 책이 <헌책방 기담 수집가>이다.
우선 가장 놀란 점은 책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물론 의뢰받는 모든 책을 다 찾은 건 아니겠지만)이다. 흡사 셜록 홈스 같달까. 매년 발간되는 책이 한 두 권도 아닌 데다, 의뢰인들이 찾는 책이 워낙 오래된 책이다 보니 안타깝게도 개중에는 이미 폐업한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있는데, 작은 단서와 단서를 연결해 퍼즐 조각을 짜 맞추는 과정이 한편으론 짜릿하기도 하다. 의뢰인이 책 제목을 모르는 상황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책을 찾아낸 '작은 단서라도 좋습니다' 편이나 '책캐구우초오교오'편, 정말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그리고 모험은 계속된다'처럼 극적인 재미를 주는 사연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물론 이 책은 책을 찾는 과정보다는 의뢰인의 사연에 더 방점을 둔 책이다 보니 말하자면 추리 과정이 자세히 담기지 않은 면도 있지만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인간극장스러운 서사로 독자를 잡아두는 매력이 있다. 아내와의 사랑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40년 만의 완독'편, 형제간의 우애를 느낄 수 있는 '근육맨'편, 대한민국 현대사의 단면을 볼 수 있는 '일생의 유일한 친구'편 등. 타인의 인생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 책이 주는 효용이 참으로 다양하지만, 인생을 기억하게 하는 훌륭한 조연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책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책 스스로 나타나주어야 한다. 헌책방에서 일하다 보니 책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게 됐다. 어떤 책은,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책이라는 걸 아는데도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인데 며칠 만에 나타난다. 그건 어떠한 자연법칙이나 심리학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책이 제 의지로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알라딘 중고서점이나 예스24 중고서점처럼 재고를 미리 확인하고 명확한 목적에 의해 방문하는 중고서점이 아닌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와 같은 상황으로 인연을 맺게 되는 즐거운이 중고책방의 진정한 묘미일 것이다.
어떠한 자연법칙이나 심리학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책의 의지로 오랜 시간을 돌고 돈 끝에 자신이 찾던 책을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진실은 소설보다 더 기묘하다"는 말은 마크 트웨인이 했다고 전해진다. <헌책방 기담 수집가> 속 기담 수집가가 수집한 헌책 의뢰인들의 이야기는 책을 찾기를 간절히 원하던 사람에게 결국 책이 찾아오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과 생각을 접하는 기쁨이 더 컸다.
기담을 제공한 사람들처럼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는 중고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게도 꽤나 소중한 중고책이 있다. 지호 출판사에서 나온 <서가에 꽂힌 책>이라는 책인데, 예전 직장 서가이 있던 책 중 한 권이다. 제목의 느낌이 좋아 출퇴근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한 책인데 '책'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 아주 흥미로웠다. 소장하고 싶어 서점을 찾았지만 이미 절만. 당시엔 인터넷 중고서점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인 데다 몇몇 오프라인 중고서점에서도 이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총무팀장님께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책을 가져가라고 말씀해 주셨다.
며칠 전 재미 삼아 책을 검색해 봤더니 2021년에 서해문집에서 <책이 사는 세계>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됐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검색하면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책이 다수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내용이 같더라도 신간을 구매했다면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을까? <헌책방 기담 수집가> 속 의뢰인들도 '반드시 00출판사에서 나온 초판이어야 한다'라고 말한 이유도 이와 같은 것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 비해 지금은 책이 넘쳐나고 책을 구입하거나 빌려 읽기도 더 좋은 시대이다. 하지만 책 외에도 정보를 접하거나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수단도 함께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독서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있다. 책 속 의뢰인들의 사연이 대부분 책이 더 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보니 더 소중하고 특별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전이건 지금이건 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책에 얽힌 추억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책이라는 매체 자체가 저자와 독자의 생각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고, 그 책을 함께 경험한 사람과 사람 간 생각을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연결된다는 것, 생각을 나눈다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생각해 보면 나 스스로도 예전에 비해 책 선물을 덜하고 있다. 생일 선물이 카톡 선물하기로 대체되어 가는 지금, 그 사람은 어떤 걸 좋아할까를 고심하며 책 선물을 고르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보며 그 책과 연결되던 순간을 다시금 떠올려야겠다. 그리고 그 좋은 순간의 기억을 전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그 책을 건네며 대화의 꽃을 피워야겠다.
이 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아무리 책을 좋아하더라도 중고책방을 운영하면서 돈은 벌어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지금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없는 이야기의 가치가 느껴진다.
올해 2월에 윤성근 님의 새 책 <헌책 낙서 수집광>이 출간됐다. <헌책방 기담 수집가>와는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매력이 뿜뿔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