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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하 Jun 23. 2020

코로나가 습격한 워홀러 일상

출근 첫날 COVID-19 때문에 국경이 폐쇄되고 집에서도 쫓겨났다

수많은 집을 보러 다닌 끝에 운 좋게도 렌트비가 놀라울 정도로 싼데 컨디션은 정말 좋은 집으로 이사를 했고, 같이 살게 된 가족들도 좋은 분들이었다. 여행자 겸 백수로 지낸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 우연히 좋은 기회를 얻어 마케팅 직무로 면접을 봤고 곧바로 출근하게 되었다. 타이밍도 운도 정말 좋았다. 캐나다의 COVID-19 환자가 급증하고 트뤼도 총리가 캐나다 보더 폐쇄를 발표하기 전까진.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는 호수로 산책도 자주 가고 그랬다


트뤼도 총리 담화는 내 첫 출근날 예정되어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회사 분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컴퓨터를 세팅하면서 담화를 기다렸다. 국경을 폐쇄할 것이다, 락다운을 할 것이다, 온갖 소문이 무성했다. 락다운을 한다면 직격타를 받을 수밖에 없는 레스토랑 비즈니스였기에 회사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트뤼도 총리는 그날 캐나다 보더 폐쇄를 발표했다. 락다운 조치까지는 아니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날부터 거리는 텅텅 비기 시작했고 많은 회사들이 재택근무를 시작하거나 고용을 취소했다. 스타벅스와 팀홀튼은 매장 운영을 접고 투고만 운영하기로 했으며 그마저도 몇몇 매장에 한해서였고 많은 스토어가 문을 닫았다. 


출근 첫날 잘리는 게 아닐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불안했다. 이 상황이라면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실제로 총리 담화 이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다행히도 스케줄은 조금 조정되었지만 일단은 출근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한동안 상황을 보자는 말과 함께. 언제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 불안했다. 


그렇게 첫 일주일을 정신없이 보내고 첫 주말이 찾아왔다.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고 투덜거리며 고기와 와인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엔 든든히 먹고 푹 쉬어야 또 불안한 한 주를 잘 버텨내지. 심란한 마음으로 넷플릭스를 켜고 거하게 차린 저녁을 먹으려는데 집주인이 나를 불렀다.


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기한은 한 달.


갑자기? 최소 계약 기간을 명시한 계약서를 쓸걸, 그럼 난 이 상황에 어딜 가라는 거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집주인 앞에서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너무 당황스럽고 막막해서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저녁은 다 식고 와인은 마실 생각이 뚝 떨어졌다. 회사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런 만큼 일은 더 잘해야 하고, 그런데 집까지 새로 구해야 한다니. 막막함에 눈물이 났다. 현실에서 발을 떼고 약간은 둥둥 떠서 살았던 50일만큼의 무게가 순식간에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집 보기는 이제 끝인 줄 알았더니만 이사온지 한 달도 안돼서 이게 무슨 일이람. 오래오래 살 집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한국 갈까. 잠깐 정신을 놓고 친구들에게 나의 불운에 대해 하소연하다가 계속 튀어나오는 불만과 한탄을 애써 눌러보며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당장 내일부터 룸 뷰잉 약속들을 잡아야 했다. 그래, 그렇게 예쁘다는 밴쿠버의 여름도 못 봤는데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 일단은 좀 더 붙어있어 보자.


(멘붕을 다스리고 난 뒤에 다시 생각해보니, 가족들의 건강 이슈로 방을 비워달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런 자연재해 앞에 인간들이 뭐 어쩌겠는가. 당시엔 화도 나고 당황스러웠지만, 여러모로 고마운 가족이었고 마지막엔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집을 나왔다.)


텅 빈 다운타운과 텅 텅 빈 출근길 스카이트레인


이제 조금 안정되려던 나의 일상이 요동쳤다. 친해지려던 사람들과는 인스타그램으로만 겨우 안부를 전했다. 모든 모임과 스터디, 수업이 취소되었고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 등록하고 딱 하루 운동을 나갔던 커뮤니티센터에서도 환불을 받았다. 당장 다음날부터 아예 무기한 문을 닫는다길래 저녁 늦게 가서 환불을 받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서로 어색하게 웃으며 Stay safe,라고 인사를 나눴다. 


아무도 없는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출근을 하고, 일을 가지 않는 날에는 매일 집을 보러 다녔다. 친구가 준 작은 손소독제와 한국에서 조금 가지고 나왔던 마스크를 며칠씩 아껴 쓰면서. 처음 집을 구할 때 세웠던 몇 가지 기준이 있었는데, 이때는 그냥 렌트만 내가 감당할 수 있다면 웬만한 조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고정지출을 줄여야 했다.


그렇게 몇 주를 떠돌아다니고 이곳저곳 수소문한 끝에, 회사 분의 도움으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또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너무 고요해서 이상했다. 몇 주 전까지 내가 알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이 사태를 해외에서 혼자 맞이하게 되다니. 당장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심지어 나는 밴쿠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는 사람도 몇 없었고 딱 둘 있던 친구들도 각자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나마 같이 이겨내고 있다며 서로를 위로하는 마음이 큰 의지가 되어 다행이었다.


재난은 사회를 폐쇄적으로 만든다. 가족끼리 혹은 커뮤니티의 멤버끼리 결속하고, 선 밖의 사람들은 배제된다. 선은 여러 방향과 층위로 그어져 있고 선 밖에 사람들이 있다. 나도 선 밖의 사람이어서 그 막막함과 공포감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게 풀렸고 여러 사람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감각을 곱씹으며 이전과는 다른 삶에 대해, 그리고 이전에도 있었지만 코로나 시대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그 선에 대해 생각했다.


당장은 내가 하루하루를 잘 버텨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을 어떻게 잘 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새로운 일상이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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