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 -
4년간의 연애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러다 결혼하면 그 끝은 이혼일 것만 같아서.
싱글의 일상을 잘 보내던 어느 날,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가 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바로 오케이 했다. 누군가 내게 '자만추할래? 소개팅할래?' 묻는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선택할 거니까.
나는 소개팅 파다.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는 시간이 불편하지 않다. 때로는 오랜 지인과의 만남보다 더 편할 때도 있다. 그리고 소개팅하는 과정은 꽤나 흥미진진하다. 상대방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건 직장, 주선자와의 관계, 사는 곳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는 대략 1~4시간 안에 '이 사람이 내 취향인지 아닌지', '1번 더 만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각을 비롯한 오감을 총동원해서 실시간으로 입력되는 정보를 필터링하며 이를 통해 헤어지기 전까지 결과를 산출해낸다. 마치 게임 미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소개팅은 성격 급한 나에게 최단 시간 내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인 것이다.
잠시 느슨해진 추위에 네이비색 코트를 걸친 겨울날. 나는 큰 기대도, 이른 실망도 하지 않은 채 퇴근 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곳은 내가 사는 곳의 지하철역 1번 출구. 알고 보니 그와 나는 지하철로 겨우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데다 내가 살던 곳은 소위 핫플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 만나기로 했다.
출구 밖으로 나가자 진한 회색 코트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주선자가 미리 말해준 것처럼 키는 크고, 몸집은 생각보다 날씬했다. 카톡 사진은 약간 통통해 보였는데. 최소 1년 전에 찍은 사진임이 틀림없었다.
어색한 인사 후 '날이 춥네요' 따위의 말을 하며 우리는 그가 예약해둔 파스타집으로 향했다. 일반 주택처럼 생겼는데 양식 메뉴를 파는 곳이었다. 자리에 앉아 목도리와 코트를 벗고 옆자리에 개어 놓았다. 그도 코트를 벗었다.
와. 무슨 어깨가 저렇게 넓어?
그가 코트를 벗자 태평양처럼 넓은 가슴 아니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가 드러났다. 운동선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가 이때까지 본 남자 중에서 으뜸이었다.
어깨뿐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태가 얇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메뉴판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이 샤프했다. 적당히 울리는 낮은 목소리, 서울 사람 특유의 부드러운 말투도 좋았다.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마음속 전광판에는 점수가 떴다. 100점 아니 120점!
하지만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 소개팅에서 외모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외모에서 깎인 점수를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대화가 잘 통하는가.'
회사 다니기 힘든 이유야 셀 수 없지만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만큼 신경질 나는 것도 없다. 반면 상대방과 척하면 척 통할 때는 일이 많아도 신바람이 난다. 그러니 연애를 할 때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 다른 조건에서 초과 점수를 기록했더라도 대화가 안 통하면 결국 관계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수많은 생각과 경험을 끊임없이 공유하는 연인 사이에 있어 대화의 질은, 더 깊고 안정적인 관계로 향하는 밑거름 혹은 다툼이나 이별로 향하는 지름길이 될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다행히도 나와 그는 대화도 잘 통했다. 자기 생각은 차분하게 말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는 적극 공감하며 들어주는 방식이 비슷했고 리액션도 좋으니 티키타카가 잘됐다. 게다가 둘 다 영화를 좋아하고 특히 미드 프렌즈의 팬이었다! 프렌즈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 NBC에서 방영된 시트콤이다. 뉴욕에 사는 여섯 친구들의 유쾌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방영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작품.
프렌즈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의 최애 프로그램이다. 자취를 할 때는 늘 노트북에 프렌즈를 재생시켜 놓았고 지금도 특별히 볼 게 없으면 넷플릭스로 프렌즈를 본다. 이렇게 '프렌즈 쳐돌이'인 내가 난생처음 프렌즈 팬을 실제로 만났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프렌즈 덕분에 대화에는 불이 붙었고 칵테일 바로 자리를 옮겼다. 함께 웃고 떠들고 마시며 무엇하나 아쉬울 것 없는 시간이었다. 어느덧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켰고 우리는 처음 만난 지하철역 출구 앞에서 헤어졌다.
< 집에 잘 들어갔어요? 저는 소여 씨가 마음에 드는데 우리 또 만날까요? >
적지 않은 소개팅 경험에 의하면 애프터 문자가 오고도 남아야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씻고 나와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도 휴대폰은 조용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도 좋았고 상대방도 내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소개팅을 주선해준 지인에게 카톡을 보냈다.
< 저 까였나 봐요 ㅎㅎ >
연애와 결혼 사이 공황장애 매거진 (brunch.co.kr) 매거진에서 시리즈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