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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Jan 26. 2022

스키는 짜릿해 새로워 최고야

1월의 도전

구독하는 뉴스레터에 배달의 민족 출신 마케터이자 작가인 숭님의 인터뷰가 실렸다. '새해 목표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숭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새로움이 한 방울이라도 있는 한 해였으면 좋겠어요. 어떤 새로움일지는 저도 모르지만

'매달 새로운 일을 하나씩은 꼭 해보자'라는 새해 목표를 세웠어요.

다양한 변화를 유연하게 맞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 달에 하나씩 도전한다면 1년 동안 무려 12가지의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도 따라 해 보기로 했다. 대신 조건을 달았다. '매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일 것.' 내가 1달에 1번 챌린지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일상에 즐거움을 더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일의 종류나 횟수는 논외다. 이전에 해본 적 없는 일을 시도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2022년 1달 1가지 챌린지

1월의 주제는 스키다.




1월 8일 토요일 아침 6시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부스스 일어나 불을 켠다. 오늘은 나와 남편이 태어나 처음으로 스키를 타러 가는 날이다. 나는 일 년에 눈 한 번 보기 힘든 남쪽 지방 출신이라서, 남편은 서울 토박이지만 농구를 제외한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라 우리는 평생 스키와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다 주말에 별 일도 없고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스키를 한 번 타볼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둘 다 생초보라 무턱대고 스키장에 갈 수 없어서 렌탈샵을 통해 1:2 강습을 신청했다. 11시 수업은 마감이라 9시로 예약했더니 한 시간 전까지 렌탈샵에 도착해야 한단다. 덕분에 평일에도 하지 않는 새벽 기상을 했다. 6시 30분, 내의에 롱패딩으로 중무장을 하고 핫팩과 만원 짜리 스키 장갑을 챙겨 차에 탄다. 출발이다.


뻥뻥 뚫린 고속도로를 한참 달린다. 하늘이 오묘한 빛을 내며 점점 밝아지고 한산한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스피커에서는 최근 남편이 꽂힌 가수 카더가든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유튜브에는 개그맨처럼 나오더니 노래는 꽤나 감성적이다. 나름 반전 매력이 있네 싶다가 카더가든이라는 예명은 무슨 뜻인지 궁금해진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렌탈샵에 도착했다. 긴 머리를 야무지게 묶은 남자 사장님께서 우리를 맞이해주신다. 외모만 봐서는 예전에 한주먹 하셨을 법한 거친 포스가 뚝뚝 떨어지는데 매장 안은 크리스마스의 여운이 남은 듯 알록달록한 장식으로 가득하다. 이질적인 분위기에 살짝 긴장했는데 스키 부츠를 고르고 나니 사장님께서 안마의자에 앉아 한창 마사지를 하고 계신다. 급 친숙함 한 스푼.


이제 남편과 2층으로 올라가 옷과 헬멧, 고글을 고른다. 상큼한 민트색 상의에 흰색 바지를 입고 싶었는데 대여 가격이 저렴해서인지 특별히 눈에 띄는 옷이 없다. 난해한 무늬와 휘황찬란한 색 사이에서 겨우 심플한 하늘색 상의를 찾았다. 하의는 흰색으로 입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사이즈가 맞지 않아 그레이로 대체한다. 그래도 헬맷과 고글은 화이트로 맞췄더니 나름 괜찮은 것 같다.


남편도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 피자헛 배달부인가?


피자헛과 라이더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빨강과 검은색이 뒤섞인 스키복을 보니 피자헛이 절로 떠오른다. 게다가 팔도, 기장도 짧아서 남의 옷을 입은 티가 팍팍 난다. 본인은 솜이 들어가 있어서 골랐다는데 따뜻해 보이긴 하나 안 그래도 큰 덩치가 더 둥글고 거대해 보인다. 완전히 부푼 공 같다. 화룡정점으로 검은색 헬맷에 마스크까지 착용하니 영락없는 라이더 복장. 며칠 전에 어벙벙한 패딩 때문에 쿠팡맨으로 오해를 받더니 이쯤 되면 운명인가 싶다.


'진짜 그거 입을 거야?' 순수한 질문인 듯 하지만 당장 갈아입으라는 나의 속뜻을 남편은 단번에 캐치한다. 다시 행거로 가더니 심플하고 사이즈도 넉넉해 보이는 그레이 점퍼를 찾아냈다. 훨씬 낫다는 내 말에 남편은 다시 탈의실로 가 옷을 갈아입는다. 휴, 하마터면 인간 피자헛과 스키를 탈 뻔했다. 사진으로 찍어둘걸.


트렁크에 스키를 싣고, 나는 스키부츠를 아예 신고 차에 탄다. 아이언맨이라도 된 듯 종아리가 무겁고 단단하다. 스키장에 도착하니 어디서든 본인을 잘 찾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인지 진한 오렌지색 옷을 입은 강사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몇 가지 질문에 '태어나서 오늘 처음 타요.' '부부예요.' 등의 대답을 하고 이제부터 편하게 '어머님, 아버님'으로 부르겠다는 강사의 말에 둘 다 고개를 끄덕인다.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너무 힘들다. 발에 긴 막대기를 단 채 걸으려니 몸이 앞뒤로 우스꽝스럽게 움직인다. 남편은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는데 나는 자꾸만 제자리걸음을 하다 슬슬 뒤로 밀리기까지 한다. 결국 선생님의 폴대를 잡고 끌려간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몇 번 더 걷기 연습을 한 뒤에 리프트를 타고 왕초급 슬로프로 향한다.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다리를 리프트에 고정시키고 흰 눈으로 뒤덮인 슬로프를 내려다본다. 스키 타는 사람, 보드 타는 사람,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유치원에 다닐 법한 어린아이들도 있어 깜짝 놀랐다. 선생님 말로 요즘에는 네다섯 살부터 스키를 배우는 애기들도 많단다. 내가 '아 제가 너무 늦게 왔나 봐요' 하니 선생님은 이제라도 잘 시작했다며, 시즌권을 사서 열심히 배워보라고 귀신같이 영업을 한다.


리프트에서 내릴 때는 딴생각을 해선 안 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넘어지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두 다리는 적당한 간격으로 벌리고 스키는 일자가 돼야 한다. 그 상태에서 리프트가 도착하면 스쾃를 하듯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땅을 짚고, 회전하는 리프트가 허벅지 뒷면을 탁 치는 순간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이때 주의할 점은 허리를 펴고 서거나, 다리 모양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는 것. 그럼 바로 고꾸라진다.


드디어 스키를 본격적으로 배울 시간이 왔다. 다리는 A자를 유지하고 무게중심이 뒤로 가지 않도록 두 초급생은 양손을 허리에 올린다. 감속을 할 때는 발뒤꿈치를 바깥쪽으로 뻗어 위에서 누른 듯한 A자를 만든다. 이제 강사님은 뒤로 내려가는 신공을 발휘하며 우리를 코치한다. 살짝 긴장은 되지만 스쾃를 할 때처럼 허벅지에 힘을 딱 주고, 등과 어깨에 들어간 힘은 뺀 채 두 팔을 편안히 허리에 올리니 어느새 내가 탄 스키가 스르르 눈과 마찰을 일으키며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걷기 연습을 할 때만 해도 괜히 왔다 싶었는데 방향 전환까지 배우니 삽시간에 빠져든다. 스키는 직선으로 활강할 경우 가속도가 붙으면서 사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좌우로 S자를 그리며 내려가야 한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다리는 A자로 유지하고 양팔은 쫙 편다. 그러다가 우측으로 꺾을 때는 오른쪽 팔을 오른쪽 발에 닿게 한다. 그럼 몸이 자연스럽게 기울며 무게가 실리고 방향이 바뀐다. 나와 남편은 마치 인간 날다람쥐라도 된 듯 온몸을 쫙 펼친 채 왼쪽으로 기울었다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가 한다.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게 재밌다.


곧잘 따라 하는 나를 보더니 선생님께서 '운동 좀 하세요?' 물어본다. 초등학교 때 늘 달리기는 꼴등이었고, 피구는 공을 피하다가 제일 마지막까지 남기 일쑤, 뜀뜰도 평균대도 무서워하던 내가 이런 칭찬을 듣다니! 어깨가 한껏 으쓱해진다.


반면 남편은 스키가 영 낯선 지 천천히 진도를 빼고 있다. 선생님은 남편에게 찰싹 붙어 일대일 교습을 하고 나는 혼자서 달린다. 귓가에는 믹서기에 얼음을 가는 듯 쉭쉭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는 새하얀 설원이 펼쳐진다. A자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되 몸의 밸런스를 옮겨가며 방향을 바꾼다. 주위 사람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나는 날개라도 단 듯 자유롭게 하강한다. 차가운 바람과 정면으로 부딪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가슴이 뻥 뚫릴 듯 시원할 뿐. 사람들이 왜 스키를 타는지 알겠다. 영상 4도의 날씨에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니, 새롭고 이상하고 즐겁다.


남편도 곧잘 스키를 타기 시작하자 선생님은 이만하면 됐죠? 오늘 즐거웠죠? 라며 자꾸 이별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한 시간 반 만에 수업을 끝내고 사라졌다. 돈이 조금 아깝지만 괜찮다. 같이 리프트를 타고 가는 동안 없는 할 말까지 꺼내느라 애쓴 선생님의 노력이 가상하다.


사실 오늘 나와 남편은 스키가 아닌 보드를 배우려고 했었다.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 교습 2시간이면 스키는 어느 정도 탈 수 있지만 보드는 포기를 결심하게 된다고. 그래서 스키로 바꾼 게 천운이었다. 스키 타는 사람들은 슝슝 내려가고 있는데, 보드를 타는 분들 대부분은 엎드려 있거나 누워 있다. 초급 보더 때는 넘어지는 게 일이라더니 정말인가 보다. 강습 때 선생님이 넘어지는 연습도 한 번은 해야 된다고 해서 어설프게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눈 위가 아니라 아스팔트에 넘어진 줄 알았다. 너무 딱딱해서. 스키어들에 비해 스타일리시하게 차려입은 보더들에게 자꾸만 눈이 가지만 엉덩방아를 찧던 순간을 생각하면 오늘은 스키를 배우길 잘했다.


스키장에 도착한 지 3시간쯤 지나자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추위에 아려오기 시작한다. 몸은 내의와 핫팩으로 무장을 했는데 손, 발 끝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스키 부츠를 신고 뒤뚱거리며 카페테리어로 들어갔다. 다들 스키 안 타고 여기 모여 있었네 싶을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하다. 후후 김을 불며 뜨끈한 라면이나 우동을 먹는 사람들에 눈이 가지만 점심은 이따 제대로 먹기로 하고 나는 핫초코, 남편은 커피를 시킨다. 달콤한 음료 몇 모금에 얼어있던 몸이 사르르 녹는다. 이 맛에 또 스키를 타는구나.


다시 슬로프로 돌아와 몇 번 더 스키를 타고 보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4시간에 불과했지만 스키의 강렬하고 짜릿한 매력에 빠져들기에는 충분한 시간.


겨울의 어느 날 설원에서 느끼던 상쾌함.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제목은 위 밈을 패러디했다. 스키도 잘생긴 것도 짜릿해 새로워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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