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번쩍
분명히 눈앞은 깜깜한데 어디에선가 빛이 번쩍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고소한 냄새가 난다.
내 속눈썹이 타고 있다.
사회초년생 시절 나는 겁도 없이 문신을 했다. 문신도 꽤 여러 종류가 있는데 당시 인생의 진리처럼 여겨지던 Carpe Diem 같은 레터링을 하거나 고양이 같은 캐릭터를 새기지는 않았다. 나는 검은색의 줄을 새겼다, 속눈썹을 따라서. 아이라인 문신을 한 것이다.
내가 신입사원일 때 반영구 시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화장에 큰 관심도 솜씨도 없던 나였지만 쌍꺼풀 없는 두 눈을 또렷하게 만들어준다는 말에 넘어가 시술을 받았다. 시술 후에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눈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 앞머리부터 꼬리까지 뺀 라인 덕분에 눈이 더 길고 선명해 보였다. 셀카를 찍을 때 특히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무쌍인으로 태어난 나는 유쌍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쌍꺼풀 수술을 한 것이다. 처음에야 느끼해진 인상에 적응을 못해서 방황했지만 점점 수술했다고 하면 남들이 깜짝 놀랄 만큼 자연스러워지자 수술한 눈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 바로 반영구 아이라인 문신.
쌍꺼풀이 없을 때는 아이라인 문신이 눈꺼풀에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쌍꺼풀이 생기자 그늘에 드리워져 있던 아이라인 문신이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화장을 하지 않은 날, 말간 얼굴에 편안한 차림으로 나가도 꼭 눈만 메이크업을 한 듯한 모습이 되어서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5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며 어느새 피부같이 가까운 존재가 되어 버린 아이라인 문신. 반영구라는 말이 이렇게 지독하게 느껴질 줄이야. 결국 아이라인 문신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온라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문신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백 배 천 배 아프다, 아이라인 문신 제거하려고 마취 주사 맞다가 죽는 줄 알았다 등등 살 떨리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7살부터 치과를 다니고, 13살부터 피부과에서 여드름 압출하며 웬만한 고통에는 익숙해진 사람이라 '문신 제거 레이저쯤이야.'하고 병원을 예약했다.
2월 첫째 주 토요일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마취 주사를 맞는 상상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이 모는 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 접수 후 간단한 상담을 하고 시술실로 향했다. 홀로 의자에 누워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서랍 위에 라이언이었나 캐릭터 인형이 놓여 있었는데 아마도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에게 쥐어주는 용도인 것 같았다. 남편 앞에서 센 척하긴 했지만 내심 눈꺼풀에 주사를 4방이나 맞아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했던 터라 할 수만 있다면 인형을 껴안고 싶었다. 그러나 간호사 선생님은 인형을 건네주지 않았다.
아이라인 문신 제거는 이렇게 진행됐다.
1. 안약을 넣는다
가장 먼저 안약을 넣는다. 안구건조증에 넣는 안약과는 느낌이 다르다. 눈이 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고 살짝 시야가 흐리게 변한다.
2. 보호렌즈를 낀다
안구 보호용 렌즈를 낀다. 내가 렌즈 낀 모습을 누가 찍어주지 않아서 못 봤지만 아마도 공포영화 주온에 나오는 토시오처럼 눈동자가 전부 까맣게 보였을 거다. 렌즈 이물감 때문에 불편했다는 사람이 있던데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3. 마취주사를 맞는다
아이라인 문신 제거는 마취 주사를 맞느냐 or 마취 크림을 바르느냐 2가지로 나뉜다. 1번은 무려 얇디얇은 눈꺼풀에 주사를 4방이나 맞아야 하지만 대신 레이저를 받을 때 고통이 1도 없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2번은 주사는 피할 수 있지만 레이저가 고통스럽다는 의견. 나는 마취 주사를 놓는 병원을 선택했는데 후기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는 고통이다, 마취 주사 때문에 또 받을 엄두가 안 난다 같은 의견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공포심을 조장했다.
렌즈를 끼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 선생님이 방에 들어왔다. 렌즈 때문에 눈앞이 깜깜해서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그의 손에 주사기가 들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시작할게요. (모든 병원 공통어)따끔.' 이라며 왼쪽 눈꺼풀에 첫 방을 날렸다.
나는 정말 고통에 강한 걸까, 아니면 둔감한 걸까?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대신 눈이 엄청나게 쪼였다. 왜 마그네슘 부족으로 눈꺼풀이 떨릴 때 있지 않나. 그때처럼 내 의사와 상관없이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눈의 모든 근육이 저절로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생경하고 불편한 감각이었지만 다행히 아프진 않았다.
4. 레이저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의사 선생님은 속눈썹 라인을 따라 레이저를 쏜다. 마취 주사 덕분에 하나도 안 아프다. 굳이 느끼자면 미세하게 따끔거리는 정도. 대신 보호렌즈를 꼈음에도 눈꼬리에 레이저를 쏠 때는 번쩍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편안하게 레이저를 받고 있는데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이 타는 건가 싶었는데 살은 무슨 내 속눈썹이 타는 냄새였다. 숱한 후기를 통해 속눈썹이 하얘지거나 사라져 버린 사례를 봤지만 정작 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끝나고 보니 내 속눈썹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있었다. 아주 하얗게.
레이저는 5분도 안 돼서 끝났다. 회복실로 자리를 옮겨 15분간 얼음찜질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눈은 개구리 왕눈이처럼 부어올랐고 보라색 멍이 작게 들었다. 그리고 앞이 자꾸만 흐리게 보였다. 우리 집 TV가 65인치인데 유퀴즈 자막이 잘 안 보일 만큼. 겁은 없지만 걱정은 이상하리만큼 많은 나는 (앞으로도 눈이 안 보일까 봐) 병원과 약국에 전화를 걸었고 '안약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먼저 시술한 분의 블로그에 문의 댓글도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한두 시간 더 지나 시야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부기는 이틀 후쯤 빠졌고 멍은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오늘로 시술 한 달 차. 다음 달에 2차 시술을 받을 예정이다. 적어도 3차까지는 받아야 다 지워질 듯싶다. 고생스러운 과정이지만 아이라인이 많이 옅어져서 만족스럽다.
사람들 말처럼 문신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어렵다. 아무쪼록 문신은 신중 또 신중하게 하시길. 다시는 아이라인 문신을 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렇게 내 생애 첫 문신 제거는 끝!
이 글은 2022년을 맞아 한 달에 한 가지씩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1달 1가지 챌린지>의 2월 버전입니다.
1월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스키를 탔고 3월 미션은 아직 고민 중입니다.
저의 1달 1가지 챌린지를 지켜봐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