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금 긴 해외출장을 다녀왔다. 연말 인사이동 후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고, 맡겨진 업무들 중에는 해가 바뀌자마자 낯선 타지에 나가 해치워야 하는 일도 있었다. 모처럼 큰 바다를 건너가는 출장길이었다.
처음 맡은 임무였지만, 출장지에서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믿음직한 동료들 덕분에 모두 무사히 마치고 귀국 편 비행기를 탔다. (이 많은 일들을 어떻게 제때 다 처리하나 싶어 나도 모르게 얼굴이 어두워졌을 때, 팀원들은 걱정할 시간에 일이나 도우라며 게눈 감추듯 일을 쪼개어 타다다닥 쳐내고, 그예 다 매조지었다. 역시 나만 잘하면 된다는 건... 진리다!)
귀국길도 순탄치는 않았다. 국내선 비행기가 예상치 않게 지연되어 하마터면 경유지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못 탈 뻔했다. 간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탑승에 성공했는데, 혹시나 못 타서 오늘 못 돌아가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비행기에 타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창 밖으로 어둑한 바다가 보였다. 이미 해가 져 깜깜한 바다 위에, 점점이 작은 불빛들이 깜빡였다. 농구나 축구 경기 말미에 관중석에서 켜는 휴대폰 불빛들 같이 밝아졌다가, 차차 동네 별빛처럼 아스라해졌다.
어선들이었다.
배를 타는 사람들. 선원들이 저 바닷속에서 생업을 잇고 있다.
2.
장인어른을 직접 뵌 적이 없다. 아내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급히 전화를 받고 아내의 고향에 당도했을 때 장인어른은 이미 검은 액자 속에 모셔져 있었다. 너무 이른 나이,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장인어른은 선원이었다. 꽤나 오랜 시간 배를 타셨다 한다.
처가에 가면 장식장 한가득 양주들이 빼곡하다. 언뜻 봐도 세월의 무게가 있는 술들이다. 조니워커도 그냥 조니워커가 아니고, 로열살루트도 그냥 로열살루트가 아니다. 용량의 거대함에서 한 번 압도하고, 라벨의 연식에서 나오는 클래식한 아우라가 면세점이나 기내 면세품 목록에 나와 있는 술들과 같은 브랜드라고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거대한 술병들 사이에는 아기자기한 술들도 있다. 모차르트 양주는 아마 깔루아 같이 초콜릿이나 커피가 섞인 주종일 텐데, 그 자체로 귀염상이다. 크고 작은 술들이 사이좋게 장식장 속에 자리 잡은 채 그렇게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 간다.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술병 가득한 그 장식장은 그러나 굳게 잠겨 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장모님께 한번 여쭤봤었다. 저 많은 술 누가 다 마시냐고. 장모님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셨던 것만 기억난다.
장식장 속 술들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장인어른은, 타지에서 돌아올 때마다 한 병씩 한 병씩 이 술들을 사들고 오셨겠지. 가끔은 술 장식장 맞은편에 있는 조개 장식장에 들어가 있는 소라나 조개들도 같이 싸들고 오다가 뭐 이런 걸 갖고 들어오노 애들 먹을 거나 사 오지 하고 장모님께 한 타박 들으셨을 게다. 그래도 큰 파도와 바닷바람 속에서 싸우다 몇 달 만에 집에 들어오실 때, 아들 딸 선물이라고 외제 장난감이랑 과자도 물론 좀 사 오셨을 거다. 언뜻 보면 무뚝뚝한,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 같지만 조카들이라면 죽고 못 사는 츤데레 형님들이랑 꼭 같으셨겠지.
이제 집에 돌아간다. 겨우 집에 돌아간다. 집으로 향하는 배 위 갑판에 서 있었을 그분 마음은 대체 어땠을까.
3.
시차가 바뀌니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바삐 일처리를 하고 나면 서울 오피스에서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까스로 해야 할 일들을 마치고 잠들려는 찰나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혹시나 놓친 업무가 있었나 하고 퍼뜩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아빠~?"
딸아이의 영상통화다. 엄마 몰래 미주알고주알 오빠 흉을 늘어놓는다. 일 때문에 온 전화가 아니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아이 얼굴을 본다. 전화로 보니 더 둥글둥글하게 생겼다. 얼굴은 울상이지만, 그마저도 귀엽고, 예쁘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 아이의 아비가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지에 나와 있으니 아이들이 더 보고 싶어 진다. 아직은 부모와 같이 지내는 것이 더 익숙한 나이들이다. 오래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우 한두 주인데도 그렇다. 물론 서울에 있다고 하루종일 붙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이 별다른 게 아니고 하루에 한 번이라도 아이들의 숨결을 느끼고, 부대끼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지 못한 상황이 되어서야 겨우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먼 타지에 나와서, 딸아이의 고자질 전화를 받고서야, 그제야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엿보게 되는 것이다. 그 어른의 마음을. 영상통화는커녕, 자식들 먹여 살리겠다고 일 년에 고작 겨우 몇 번 아이들 얼굴 보면 다행인 삶을 살았던 그분의 마음을.
어떻게 보면 모두 장인어른 외손녀 덕분이다.
장인어른, 유산으로 남기고 가신 저 많은 술들은 아마도 손녀딸이 커서 다 마셔 없애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죠? 아이들이 할머니께 삼촌들에게 부리는 재롱의 가치를 따진다면 그 정도는 부담 없이 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명절에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