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달력에 빨간 날이 연이어 보이면 좋다가도 언젠가부터 슬쩍 신경이 쓰인다. 이번 연휴에는 아이들과 같이 뭘 하지…?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나가서 뭐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이 속에서 격렬히 싸운다.
6월 달력을 넘기는데 현충일 연휴가 눈에 들어왔다. 2박 3일 훌쩍 여행이라도 가면 좋겠다… 싶지만 아이들 스케줄 조정이 쉽지 않다.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더 그렇다. 토요일에는 첫째, 둘째 모두 각자 다니는 학원 스케쥴이 있다. 빠지려면 한두 주 전에는 미리 말해 둬야 한다. 학원 뿐이랴. 학교 친구들, 동네 친구들과 같이 하는 일정도 있으니 미리미리 협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엄마, 아빠 내키는 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건 길어야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까지가 아닐까.
지난 달에 첫째의 의중을 살짝 떠보니, 사촌 동생과 놀고 싶단다. 오케이. 일단 숙박비는 굳었다. 자동차 오래 타고 가기 싫다는 둘째를 이리저리 구슬러 이번 연휴는 세종에 있는 동생네에서 보내기로 했다. 자 그럼 이제 베이스 캠프는 차렸으니 어디를 간다…?
세종 근교 지도를 이리저리 확대해서 보다가 한 군데에 눈이 갔다.
부여.
부여라…
오랜만에 만나는 이름이네.
30년 전 일이다. (세상에 30년 전이라니…!) 난생 처음 차를 뽑은 아버지는 한동안 매주 주말마다 나와 동생을 데리고 밖에 나가고 싶어했다.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말그대로 밀리언 셀러가 되었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시간날 때마다 박물관이나 사찰을 찾아 다니곤 했다. 중형차에 아이들을 태운 채 이리저리 근교를 쏘다니는 건 그 시절 40대 가장의 로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러갔던 날의 느낌은 아스라이 기억이 난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라 대전에서부터 지도를 보고 오느라 꽤나 시간이 걸렸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주로 옆에서 ‘전국 여행도로 지도’를 펴고 갈림길마다 아버지가 길을 헤맬 때 돕는 조수 역할을 했다. 두어 시간 남짓 걸렸을까. 절터에 도착하니 햇볓 쨍쨍한 여름이었고, 주변엔 초록빛 녹음이 무성했다.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경내에 들어서니 다른 건 없고 탑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일상에서 마주하던 공간들과는 꽤나 다른 질감의 풍경이었다. 황량하기도 하고, 어째 좀 쓸쓸하게 보이기도 했다. 천년도 훌쩍 전의 탑이 여전히 저렇게 남아있다니. 석탑 주변을 돌며 아버지의 미놀타 카메라로 이래저래 사진을 몇 장 찍었던 기억이 난다.
현충일 아침, 아이들과 함께 부여를 다시 찾았다. 다시 부여를, 그것도 30년만에 찾게 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들은 뒷자리에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 시간 남짓한 드라이브길 내내 까르르르, 낄낄낄낄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더 크고 사춘기가 되면 조금은 서먹해질 수도 있으려나 싶은데, 아직은 그런 기미없이 사촌들끼리도 서로 즐겁게 잘 지내니 다행이다 싶다.
먼저 국립부여박물관에 갔다. 마침 백제 와당을 모티브로 한 미디어 아트 전시를 시작하고 있었다. 국립박물관치고는 그리 크지 않은 박물관임에도, 팔각형 천장을 잘 활용해서 꽉 찬 느낌이 들게 구현한 전시였다. 10분간의 화려한 영상 전시가 끝났을 때는 관람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물개박수를 쳤다. 원래는 국립부여박물관은 국보인 백제금동대향로를 보여주러 간 것이긴 한데, 나올 때 물어보니 아이들은 미디어 아트가 더 나았단다.
박물관에서 나와 이번 나들이의 하이라이트인(!)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보러 갔다. 석탑은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30년이 긴 세월이긴 했는지, 그사이 석탑 옆에는 전에는 못보던 정림사지박물관이 들어서 있었다. 박물관에서 석탑에 대한 배경지식을 사전학습하고, 아이들과 함께 석탑을 보러 갔다. 이곳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석탑을 전면에서 더 잘 조망할 수 있도록 (그리고 예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관람객을 위한 공간이 새로 꾸며져 있었다.
석탑을 보러 왔는데, 정작 눈에 들어오는 건 석탑보다 사람이었다. 관광지에 오면 늘 내 눈을 잡아끄는 건, 다른 나이드신 관람객들이다. 특히나 일흔 전후의, 아버지 연배 분들이라면 더욱. 아이들 사진을 찍으려 석탑 앞에서 차례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앞에 있는 분들이 딱 그랬다.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분들이, 손주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계셨다. 그 모습이 하염없이 좋아 보였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이제 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삼대가 같이 모여 있는 모습에 부러움이 앞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오래 시간 한 자리를 지켜온 석탑처럼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도 그러하길.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면, 사람은 죽으면 기억을 남긴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순간들, 그 순간의 풍경들, 감촉들, 냄새들. 평소에는 무의식 속에서 침잠해 있다가도, 그 기억들은 어느 순간 바로 엊그제 일처럼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양육자로서 아버지가 내게 유산으로서 남겨준 것은, 그런 기억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겨울 곶감처럼 아주 깊숙이 숨겨놓았다가, 살면서 고되다 싶을 때면 하나씩 꺼내어 되새김질 해보는 그런 것들. 달력을 보고 무심코 30년 전 부여에서의 그날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을 게다.
삼십 년 전, 그때 생각엔 절대적으로 어른이었던 아버지 나이를 헤아려 본다. 그리고는 새삼 또 놀란다. '어라, 그해 아버지가 지금 나보다 젊었네.'
육아와 일 속에서 늘 헤매느라 정신없는 나인데, 우리 아이들은 또 그런 나를 어른이라고 의지하며 마냥 올려다본다. 나는 지금, 괜찮게 하고 있는 건가?
더 나은 양육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적지 않다. 그러나 배트를 짧게 잡는다. 그냥 더도 덜도 말고, 아버지가 내게 해줬던 것보다 한 뼘만 더 해주자는 마음. 오늘의 소소한 기억이 미래에 어른이 될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자. 그이들이 가끔 삶의 무게에 눌려서 옛날 기억을 떠올릴 때, '아 그때 거기 갔었지', '아빠가 그때 그랬잖아'하고 시덥잖은 안줏거리로 삼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괜찮은 기억들을 많이 남겨주고 싶다. 그게 가까운 곳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가능한 자주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유라면 이유다.
짧은 부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어느 순간 고요하다. 고개를 돌려 차 뒷좌석을 보니 아이들 모두 곤히 잠들어 있다. 그래 아빠 따라 이래저래 돌아다니느라 꽤나 피곤했겠지. 그래도 이 여행, 알고 보면 하늘 나라에 있는 너희 할아버지가 삼십 년 전에 미리 잡아준 일정이다? 그러니 꿈 속에서 할아버지 만나면 고맙습니다 하고 꼭 감사 인사 잊지 말도록!
다음 책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 '한화 이글스'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썬데이파더스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