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종현 Sep 07. 2016

9시간 수술

2014년 8월 25일 AM 7:00 - PM 4:00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두세 시간에 한 번씩 잠에서 깼지만 몸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수술 당일인데 이상하리만큼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차디찬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 뿐이었습니다. 지난 3주 동안 제게 일어났던 상황들이 인정할 수 없는 현실. 그저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제발 모든 것이 악몽이기를 바랐습니다.


# 2014년 8월 25일 AM 7시
간호사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했습니다. 전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이동경로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입원실 밖으로 나가서 수술 환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린 후 복도로 한참을 가다가 도착한 곳은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알코올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곳이었습니다. 수술 대기실이었습니다.

"환자분 성함이 뭐죠?"
"오종현이요"
"네. 오종현 환자분은 여기서 잠시 대기하실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뿐이었습니다. 귀에는 간호사들이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월요일 아침인데도 수술 대기실은 중요한 PT날 광고 회사처럼 분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이사야 41:10)


강남세브란스 병원 수술 대기실 천장에는 이런 성구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껏 신의 존재는 믿으나, 믿는 종교 없이 살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이 저에게 하는 말처럼 마음 깊숙이 꽂혔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함께 해준다니. 그것만큼 고마운 것은 없습니다.

잠시 후 수술실로 옮겨졌습니다.
인턴으로 보이는 서너 명이 수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 왼쪽 다리를 밴드로 단단히 고정시키고 왼팔에는 여러 개의 주사 바늘을 통해 무언가가 주입되고 있습니다. 제 혈관은 너무 건강해서 탈입니다. 입원 때부터 주사 바늘이 혈관을 못 뚫고 튕겨나가거나 부러졌기 때문에 한 번 주사 맞을 때 서너 번 받는 것은 기본입니다. 지금까지 맞았던 주사 바늘 자국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병원에서 수술 준비를 인턴이 하는 거나 광고 회사에서 PT 준비를 막내들이 하는 거나 비슷하네'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 의사 선생님이 말을 겁니다.

"환자분 성함이 뭐죠?"
"오종현이요"
"네. 오종현 환자분은 곧 전신 마취 들어갑니다. 전신 마취하면 잠이 들 텐데 수술 준비가 다 되면 깨울 겁니다. 어제 설명 들으셨죠"
"네"

병원에서는 수시로 환자의 신분을 확인합니다.
이는 수술을 포함한 의학적 처치를 할 때, 한 명의 의료진이 모두 도맡아 하는 게 아니라 여러 명이 협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안전한 의학적 처치를 하기 위함입니다. 또 본인 신분을 말하게 함으로써 환자의 의식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저도 모르게 서서히 잠들었습니다.


# 2014년 8월 25일 AM 8:40 

갑자기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긴급상황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쓰러질 당시처럼 누군가가 제 등 뒤에서 갑자기 오른쪽 머리 뒷부분을 끌어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의학용어로 시저(Seizure)라고 하는 발작이 수술 준비 과정에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허어.. 허어.. 허어.. 허어.. "
전 무의식 중에 백 미터 달리기를 한 듯이 가뿐 숨을 몰아 쉬고 있었고, 귀에는 의사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환자 마스크 빨리 빼"
"허어... 허어... 허어..."
"오종현 환자분, 제 말 들리세요?"
"허어.... 허어...."
잠시 후 숨이 쉬어지면서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오종현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네..."
"수술 준비가 아직 완전하게 안 되었는데, 여기서 지체하면 환자분이 더 힘드실 수 있어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세팅해도 될까요?"
"네"
그 당시 정확한 대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의 이런 내용으로 기억됩니다. 나 홀로 병마와 싸워야 할 때 의지할 곳이라곤 병원과 의사 선생님뿐이었습니다.


#2014년 8월 25일 AM 10:00 

"오종현 환자분"
"오종현 환자분, 제 말 들리세요?"

몸이 흔들거리면서 누군가가 저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수술 준비는 잘 되었고 지금부터 종양 제거를 할 거예요. 어제 설명 들으신 것처럼 오른팔과 오른발을 차례대로 움직이게 하고 환자분 앞에 모니터 보이시죠? 모니터에 보이는 물건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네"
"오종현 환자분, 오른쪽 팔을 앞으로 올려보세요"
침대에 누운 체로 오른쪽 팔을 앞으로 뻗었습니다. 오른쪽 아래를 곁눈질로 보니 제 팔이 얼핏 보입니다.

"잘 하셨어요. 이제 오른쪽 다리를 천천히 위로 들어보세요"
"이 정도면 되나요?"
"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시면 돼요"
"앞에 있는 모니터에서 보이는 물건이 뭐죠?"
"고양이요"

제 종양은 탁구공만 한 크기로 좌반구 전두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브로카 영역으로 불리는 뇌의 언어 영역에 관장하는 부분으로, 이 부분이 손상되면 말을 더듬거리거나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말의 산출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뇌신경세포에 자극을 주며 환자의 수행 반응을 지켜보며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법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신경세포를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한 방법이며 종양을 최대한으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인데 무조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뇌신경세포는 아주 세밀하고 정밀하기 때문에 수술 시 약간이라도 오차가 발생하면 치명적인 손상을 줄 수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환자의 머리를 고정하기 위하여 마취 유도 후 두피와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는 고정 핀을 삽입합니다. 머리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열린 제 머리를 볼 수 없을뿐더러, 뚜껑이 열린 시원한 느낌 조차 받을 수 없지만 수술 도중에 손도 움직일 수 있고 다리도 움직일 수 있고 대화도 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팔을 앞으로 올려보세요""오른쪽 다리를 천천히 위로 들어보세요"
"앞에 있는 모니터에서 보이는 물건이 뭐죠?" "꽃이요"

오른쪽 팔을 앞으로 올리고, 오른쪽 다리를 천천히 위로 들고, 모니터에 나타난 그림을 말하는 게 수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2014년 8월 25일 AM 11:50

"오종현 환자분. 수술 끝났어요."
교수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이 울컥하더니 두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오종현 환자분이 잘 견디셔서 수술 잘 끝났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머리가 고정된 체로 눈물이 양 눈가로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잘 참았어. 이제 끝났어'

볼을 거쳐 귓가로 서서히 흘러내려지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말을 못 하고도 눈을 감으며 주치의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오종현 환자분, 이제 다시 재울 거예요. 마취를 한 후에 머리 봉합을 하고 수술 장비를 제거할 겁니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내일은 시련에 대응하는 새로운 힘을 가져다 줄 것이다
C.힐티


9시간 수술은 제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경험하라고 강요해서도 안 되는 저만의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수술 당일까지도 '막연하게 잘 되겠지?'라는 생각뿐 별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저 어서 회복해서 집에 빨리 가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수술 2주 후 종양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고 스스로 뇌종양 관련 정보를 접해보니 아주 심각하고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제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마음속 깊이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내 죽음이 직접적으로 다가올 때 기분이 어떨까요? '만약에' '만약에'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생각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의 기준이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9시간 수술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이자 삶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돈, 진급, 성과 같은 것들이 다 부질없어 보이고, 항상 제 주변 가까이 있어도 모르고 지내던 가족, 행복, 사랑 등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마취하기 전,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엄마, 나 수술 잘 끝났데'

'자기, 보고 싶다'

'애들아, 아빠 살아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