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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살이 역사

by 자낫

첫 원룸은 2002년 2월 서울 종로구 명륜동이었다.

진학한 학교에 기숙사가 없어 자취방을 알아봤고 신축 원룸 10평, 전세 4천만 원이었다. 지금은 명륜동에 비슷한 조건의 원룸 전세가 1억이 넘는다.


원룸 건물은 복도식이었고 한 층에 다섯 집 정도 있었다. 내 방은 코너 방으로 베란다가 두 개였다. 베란다 하나에는 주방이 딸려있었고, 또 다른 베란다는 옷장으로 썼다. 그때는 부드럽게 여닫히는 새시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몰랐다. 지금은 나무틀로 된 베란다 문을 힘겹게 여닫는 곳에 산다. 겨울에는 뒤틀린 나무 문틀 사이로 들어오는 찬 바람 때문에 집이 춥다.


자취하는 아이들 집 중에 우리 집에 유일하게 TV가 있어서 우리 집에서 모여 대선 결과를 지켜보았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대결이었고 노무현은 코 묻은 돼지 저금통 후원금으로 승리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해 준 청년들을 잊지 않으며 청와대 입구에 그 돼지 저금통들로 벽을 만들었다.


대선 결과가 확정되자 뉴스에서는 낯익은 동네 풍경을 비춰주었다. 명륜동이었다. 같이 뉴스를 본 사람들과 거리로 나왔다. 사람들이 몰리는 쪽으로 가보니 당선인이 전세로 살고 있는 주택에 당도했다.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 '오늘은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다'라며 막걸리 한 병을 치켜들고 외쳤다. 당선인 부부가 있는 2층 주택의 2층은 고요했다. 폭풍 전야처럼.


두 번째 원룸은 성대 후문 언덕 위였다. 가파른 언덕의 꼭대기였다. 한 층에 네 가구가 살았다. 공과금이 한 사람 명의로 나와서 네 집이 나눠 냈다. 언덕 골목은 자취촌이었다. 원어민 강사가 'student ghetto'라고 불렀다.


옆 건물과는 밥 먹을 때 숟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경상도 억양의 대학생 남자와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하는 여자가 동거를 했는데 나중에 생길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네 마네(당시 한국인들의 중국 시장 진출이 유행이었다)를 가지고 싸웠다. 정말 듣고 싶지 않은 이웃의 TMI였다.


민법에 따르면 원룸과 같은 다가구 건물은 옆 건물과 50cm만 떨어져 있으면 된다.


"민법 제242조 (경계선부근의 건축)①건물을 축조함에는 특별한 관습이 없으면 경계로부터 반 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


건물 간 최소거리 규정은 건물의 종류(주택/아파트)와 건물 높이에 따라 다르도록 발전해왔으나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이 법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특히 원룸 건물에.


사생활 노출에 대한 우려로 찜통더위에도 창문을 못 연다는 원룸촌 주민들의 고통을 보도한 기사도 나왔다. 건물 간 거리에 대한 상세 법은 이 블로그에 쉽고 친절하게 소개되어 있다. '경매돼지'라는 블로거인데 이런 건축법은 사실 부동산 투자자나 건축주들이 더 신경 쓴다. 당장 돈을 조금 더 아끼기보다는 나중에 더 큰 벌금을 안 맞기 위해서다. 투자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서 앞을 내다본다. 세입자들은 보통 가지고 있는 돈에 맞춰 급히 세를 살 집을 구하고,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법을 찾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이 집에서 처음 당한 전세 사기 같은 사고. 두 번째 원룸에서 전세 사기를 당했다. 금액은 3천5백만 원. 2006년이었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1억이 넘는 돈이다. 소송을 걸었으나 그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 해도 이미 세간살이를 빼고 다른 세입자가 들어간 상태여서 돈을 돌려받는 순서는 후 순위로 밀렸다. (기억하자. 전세금/보증금을 받기 전까지는 절대 나가지 말 것.) 어찌저찌 2년에 걸쳐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돌려받기는 했지만 그 후 부동산 계약에 더욱 신중해졌다.


그 후에도 원룸에서 두 번 더 살았다. 한 번은 첫 직장이 있던 군산이었고, 다른 한 번은 한창 일에 물이 오르던 시절의 영등포 문래동이었다. 군산의 원룸은 인근에 원룸 관리 사무실이 있었고 성년이 된 젊은 자녀와 부모가 전업 원룸 관리자인 가족 사업이었다. 창 너머 멀리 CGV의 빨간 간판이 밤에 빛났는데 문명의 상징처럼 보였다. 건물 앞 뒤가 넉넉히 트여있었다. 가파른 언덕도 없었다.


영등포의 원룸은 건물주가 전업 건물 관리인인 건물이었다. 1층에는 카페와 건물 관리실이 있었고 그 위로 모두 원룸(정확히는 1.5룸 오피스텔)이었다. 건물주가 건물 관리실에 상주하며 직접 건물을 관리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사람과 세를 주는 사람은 정글에서 처음 마주친 동물과 동물 같기 때문에 서로를 안심시켜야 한다. 나는 잘 교육받고 인정받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니 건물 복도에 오줌을 싸거나 밤새 술 먹고 고성방가를 하지 않는 사람임을 증명해야 했고, 집주인은 보증금을 돌려줄 만큼 책임감 있고 집 관리를 잘 하는 부지런한 사람임을 가망 세입자에게 인식시켜야 했다. 계약하기 전에 1층 관리실에서 집주인과 충분한 스몰 토크와 빅 토크를 했고 서명했다.


2013년 당시 월세는 공과금과 관리비를 제외하고 순수히 70만 원이었다. 비싼 돈이었으나 돈으로 서울 한 구석에 안식을 샀다. 창 너머로 나직한 옛날 건물의 슬레이트 지붕이 보였다. 비닐로 덮고 그 위에 타이어들로 눌러놓았다. 집주인 말로는 재개발 지역인데 원주민들과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버티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오피스텔 주변에는 편의시설이 많고 상권이 발달했다. 배달도 빠르다. 소비생활이 쉬운 환경이다. 그런데 그런 소비를 강요하는 환경과 거기에 길들여지는 게으른 생활에,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이상적인 신념보다도 현실적로 자는 공간, 먹는 공간, 생활하는 공간이 분리된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제 원룸은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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