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을 전전하다가 처음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는 2013년이었다.
서울 남동쪽 끄트머리 88 올림픽 시절 세운 아파트였다. 방 두 개, 거실 겸 부엌이 있는 복도식 아파트. 무엇보다 1층에 24시간 사람이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65세는 분명 넘었을 경비들이 교대로 보초를 섰다. 언젠가는 1층의 조그마한 경비실 창 앞에 '형님이 돌아가셔서 자리를 비웁니다.'라는 손글씨가 붙어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찌개를 끓이고 생선을 굽는 냄새가 솔솔 나는 게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거나 밖에서 사 먹지 않고 밥상을 차려먹는 사람들 사이에 산다는 게 제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이 조금 커지니 부모 외 찾아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군산 사는 대학원 동기가 서울살이 한다고 올라와 방 하나를 세 주기도 했다. 대학생이던 남동생이 데모를 한다고 서울에 왔을 때도 자고 갔다. 영어 원서 강독 모임을 꾸려서 크리스마스 즈음에 우리 집에서 연말 파티를 하기도 했다. 그때 왔던 이가 냉장고에 붙은 영화 포스터가 인상 깊었다고 한다.
판교 테크노밸리가 한창 개발 중일 때였고 판교로 출퇴근을 했다. 코딩하다가 막히면 치킨집 사장님한테 물어보라는 말이 나올 무렵이었다. 90년대 닷컴 버블 이후 IT 산업은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지만, 업계 내 빈부 격차가 컸다. 새벽 인력 사무소에서 드럼통 불을 쬐던 개발자들이 'JAVA 셋, C# 하나', 하면 봉고차에 끌려가는 밈이 떠돌았다. 하도 갑질을 당하던 여성 개발자가 화장실 칸에 쭈그려 앉아 혼자 씨발씨발 속사포로 쏟아냈다. 어쨌든 미싱은서버는 돌아가고 잘도 돌아가고 서울 남동쪽 끝자락 오래된 아파트는 편안한 안식처였다.
홍대에서 뮤지컬 동아리를 하고 공연을 올렸다. 금요일 저녁에는 2005 부산 APAC 공식 만찬주 보해 복분자 주에 마켓오 브라우니를 먹으며 노트북으로 영화를 봤다.
결국 나도 판교와 이별하고 영등포로 직장을 옮겼다. 집도 옮겼다. 그러다 돌아돌아 다시 그 근처 동네로 돌아왔다, 88 올림픽의 영광을 간직한 오래된 동네로.
결혼해 구축 아파트에 살고 있다. 방은 두 개이고 거실과 부엌이 분리되어 있다. 베란다가 하나 있다. 역시 복도식이다. 같은 층의 다른 집에 남자아이 둘이 사는데 현관문을 나설 때면 목소리가 우렁차다. 밖에 나가 노는 게 제일 좋은가보다. 아파트 네 동이 빙 둘러싸 굽어보는 가운데 자리에 놀이터가 있다. 놀이터 가장자리에 키 큰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자라고 다시 떨어지는 동안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여기서 코로나를 났다. 한 방은 안방이고 한 방은 컴퓨터방으로 꾸며 재택근무를 했다. 이 집에서 동욱이랑 1년 정도 같이 살다가 식을 올렸고 4년이 흘렀다. 처음 입주할 때 가장 먼저 들인 세간은 에어컨이었다. 그전 해에 미친 폭염이 사정없이 강타했는데 자다가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나오는 모텔로 도피했다.
안전하고 교통이 좋은 곳을 찾다 보니 아파트이다. 자발적으로 원한 주거 형태는 아니다. 욕심을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가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며 볕이 잘 드는 집에 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발이 잘 안 떨어진다. 그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인 것 같기도 하다. 어리석은 자여, 본능에 충실하라고
돌이켜보니 어느 곳, 어떤 집에 사느냐가 삶의 한 시절을 반영하는 것 같다. 살던 집마다 애정을 가질만한 구석이 있었다. 여전히 더 좋은 집, 더 쾌적한 동네를 찾는다. 또, 더 좋은 시절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