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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Sep 27. 2021

일이 중요하면 얼마나 중요하다고

모니터와 노트북 사이 빈틈에, 대각선에 앉은 인턴의 반쪽 얼굴이 보인다. 내 시야에 모니터 화면만 가득 찰 수 있게 자리를 고쳐 앉는다. 크게 한숨이 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아니, 이렇게 쉬운 일을 왜 자꾸 틀리는 거야.. 이게 그렇게 어렵나..?


오늘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A브랜드 소비자 조사 질문지 초안 작성하기, B브랜드 매체 데일리 리포트 보내기, C브랜드 옥외광고 시안 전달하기… 중간중간 광고주에게 오는 전화, 갑자기 소집되는 회의.. 그런 일을 몇 번 반복하면 하루는 순식간에 흘러가 있었다. 그 와중에 인턴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답답함이 불끈거렸다.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인턴에게 일을 넘기면 그 일은 두배가 됐다. 사회생활을 처음 하는 인턴을 챙기는 일도 귀찮았다. 첫 미팅 때, 빈손으로 참석한 그에게 “다음 미팅 땐 필기도구랑 노트북 챙겨 와야 해요.”라고 말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하.. 바빠 죽겠는데 내가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말해줘야 한단 말이야?


그러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 B브랜드가 진행하는 이벤트 페이지에 경품 개수가 처음 계획한 개수가 다르게 적혀있었다. 분명 마지막에 인턴한테 개수 확인해달라고 했는데..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벤트 경품 개수가 우리가 계획했던 거랑 다르게 적혀있어요. 확인 좀 해줄래요?” 날카롭게 말을 던졌다. “어떤.. 걸 확인해야 할까요?” 당황한 인턴의 얼굴이 내 마음을 어지럽게 뒤적거렸다. 마음을 달래며 설명하려던 참에, 갑자기 대표가 회의를 하자며 회의실로 불렀다. “잠시만요. 저 회의 좀 갔다 와서요.”


회의 내내 마음이 촉박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인턴은 자기 자리로 날 부르더니, 우리가 대화한 카톡창을 모니터에 크게 띄우며 하나하나 따지듯 말했다. “이때, 분명 대리님이 이거 확인해달라고 하셨고요, 이때는 이거 확인해달라고 하셨어요.”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지, 지금 그래서, 내가 그런 일은 시킨 적 없다는 말이에요?” “네. 카톡으로만 봐서는 그런 일 시키신 적 없는데요?” 환불을 거부하는 꼼꼼한 사장님처럼 인턴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은 잠이 오질 않았다.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인턴한테 할 말들을 미리 준비했다. 하지만 벌렁거리는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다음날, 인턴과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어제는 당황스러웠고,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다고. 금방 해결될 수 있는 문젠데, 그런 태도는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자기도 회사 생활이 매우 힘들다고 말했다.


내가 자기한테만 차갑게 대하고,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자기의 자존감이 매우 낮아있고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말하면서 인턴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눈물이 혹시 넘쳐흘러내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벌게진 인턴의 눈과 슬픈 표정을 본 순간, 내가 정말 크게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 머릿속에는 “바쁘다, 중요하다, 힘들다”는 문장만 있었구나. 내가 인턴한테 차갑게 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속으로는 이러면 안 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워낙 일이 많아서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이번 글쓰기 모임의 책은 [어린이라는 세계]였다. 어린이에 대한 존중, 어른으로서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그런데 자꾸 책 속에 '어린이'라는 단어가 '인턴'으로 치환되어 읽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도 분명, 처음 회사에 들어와서 적응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각과 기억은 다 무너졌다. 어린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경력직 세계에서 신경질만 내고 있는 못된 어른이 있었다.


제가 5학년 담임인데요, 사실  녀석들 5학년이면 학교생활도 알만큼 알고 웬만한  알아서 해야 되는데… … 하는 생각이 들곤 하거든요. 그런데 열두 살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이고 알면 얼마나 알겠냐, 어린이는 어린이구나 싶네요.”
-80P, 어린이의 세계-


이 문장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인턴의 나이를 헤아려봤다. 25살이었다. 정말 어리긴 어리구나... 나의 사회초년생 시절을 회상해보았다. 처음엔 직속 사수 없이 일해서, 작은 일 정도는 스스로 처리했다. 그래서 인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직 후 3개월 동안은 나도 대표한테 참 많이 혼났다. 퇴근하는 택시에서 일주일에 두 번은 울었던 것 같다. 친절하고 관대한 상사 밑에서 일한 적이 없어서, 나쁜 어른이 되었나 보구나 싶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매우 엄격했다. 실수 하나에도 ‘넌 왜 이모양이야.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해?’ 다그치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 잣대를 인턴에게 동일시한 게 문제였다. 나의 모자람, 나의 부족함, 나의 쪼잔함을 인정했고 사과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일이 중요하면 그게 얼마나 중요하다고. 같이 일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놓쳤다. 그 이후로도 인터의 실수는 종종 반복됐다. 하지만 신기하게,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 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길 것 같아서다…… 어린이 덕분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잘 돌보게 되었다.  
-253P, 어린이의 세계-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에게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동시에 내가 하는 실수에도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인턴과의 진솔한 대화 끝에 나는 소중한 배움을 얻었다. 눈물과 상처로 회사생활의 쓴맛을 경험했을 인턴에게 다시 한번 사과하고 싶다. 내 마음 근육이 다시 무서운 경력직 대리처럼, 딱딱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기억력이 필요하다. 인턴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상상력,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 반성하는 기억력. 좋은 어른이 되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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