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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3년차 직장인의 슬럼프 극복기 (1)

(1) 미국 서부 2주 여행기

by core


지난 번에 스타트업 3년 회고 글을 올리면서, 다음 편엔 '번아웃 극복기'를 올리겠다고 약속하고 어언 다섯 달이 지났다. 아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 지난 5개월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준비했던 프로젝트는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났고, 덩달아 업무 범위와 양도 커지고 많아졌으며, 기대했던 미국 여행도 황홀하게 다녀왔다.


변명하자면 글 발행이 늦어진 이유는, 아직 슬럼프를 극복했다! 고 속시원하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행을 하는 이유는, 브런치 팀이 매달 보내주는 알림에 조금 찔려서. 누군가는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최근 알게된 동료 작가님의 글을 읽고 뭔가 자극 받아서. 그래서 후다닥 쓰기 시작했다. 아직 극복하지 못한 번아웃 극복기. 누가 아는가? 이 글을 마칠 즈음에는 번아웃이고 무기력이고 온데간데 없어질지도.


알겠어.. 그..그만해..




프로젝트 성공, 그 이후에 짙어지는 공허함


지난 5월, 장장 6개월을 준비해온 프로젝트를 세상에 선보였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의료인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B2D, Business to Doctor)라 기사에 실리는 영광 따위는 없었지만, 업계 내부에선 꽤나 큰 반향을 남겼다. 서비스 오픈 후 30일 만에 (병의원사업자 가입자) 500개소, 70일 만에 1,000개소, 그리고 130일 만에 1,300개소를 넘겼다. 내부적으로는 전례 없는 속도였다. 무엇보다 생전 연락이 없던 동기들이 빨리 가입하는 방법을 물어오거나, 다음 제품 런칭을 재촉하곤 했다. 경쟁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포착됐다. 칭찬에 인색하던 고객들도 "이런 걸 기다려왔다", "덕분에 진료 환경이 바뀌었다" 라는 피드백을 줬다. 그제서야 무언가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내에서 이런 발표도 함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다고 했던가. 프로젝트 성공이 가시화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른 조직 개편이 일어났다. 팀이 더 커다란 규모의 조직에 병합되고 나는 그 조직에서 운영 리더를 맡는 (사실상 팀을 이끄는) 방향이었다. 70억을 투자해 만들어낸 신생 서비스와, 작년 매출 100억을 기록한 기존 서비스를 함께 꾸려나가야 했다. 그것도 신규 팀원 충원 없이. 하하.


나는 '현타'가 왔다. 왜 일은 줄어들지 않는가. 왜 성과에 대한 보상은 늘 불충분한가. 서비스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한 곳을 진득하게 파야 하는데, 왜 자꾸 이쪽도 파고 저쪽도 파라고 시키는가. 왜 주도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을 자꾸 못살게 구는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가. 확 그냥 나가서 개원해버려?




때마침 돌아온 2주 간의 미국 서부 휴가도피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기다리던 휴가 일정이 다가왔다. 사실 너무 바빠서 휴가를 기다리거나 여행 일정을 짤 틈도 없었다. 출국 당일 17시까지도 업무를 처리하다 공항으로 갔다. (마침 팀이 가장 바쁜 시즌이었다) 공항버스에서도, 공항에서도 일을 마무리하다가 마지막에서야 노트북을 덮고 비행기를 탔다.


휴가 동안 원했던 건 단 두 가지였다. 완전한 단절과 완벽한 전환. 도착해서 슬랙의 알람을 완전히 껐다. 노트북은 캐리어에 꽁꽁 숨겼다. LA에 도착해서는 바로 취침한 뒤 바로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내 여행의 목적이자, 미국 여행의 로망이기도 했던 곳. 캘리포니아의 이국적인 대자연의 풍광은 서울 빌딩 숲과 완연한 대조를 이뤘다. 그제서야 여행이 실감이 났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몸과 마음 모두. 틀림없이 여기에 있다.

@Yosemite National Park


여유로운 여행이 이번 휴가의 모토였다. 혹자는 자유여행이니까 당연히 여유로운 거 아니냐, 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유를 여유롭게 느낄 줄 아는 것도 커다란 능력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막상 주어진 여유 앞에서 어쩔 줄 모른다. 아무 것도 안 하는 데서 죄스러움까지 느낀다. 불안한 나머지 주변을 샅샅이 살핀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낸다. 어딜 꼭 들러야 하고, 어디서 무얼 사야 하고, 그래야 이득이고 가성비고 하는 것들. '여기까지 왔는데', '이왕 온 김에' 주문을 외며 일정을 구겨넣게 되는 것이다. 삶을 여행처럼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오히려 여행을 일상처럼 촉박하게 보내게 된다. (내가 정확히 그래봐서 잘 안다.)


@Irvine

나는 100% 대문자 J 인간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주어진 여유 앞에서 차분하기로 다짐했다. 방 안의 코끼리같은 커다란 여유가 들이닥쳐도, 두려워하거나 어색해하지 않기. 있는 그대로 맞이하기. 비효율적으로 다니기. 무엇도 아까워하지 않기. 그냥 존재하고, 시도하고, 느끼기. 완전히 (이전 세계와) 단절되고, 완벽하게 (새로운 세계로) 전환된 채로.


@San Diego


그리하여, 2주 내내 일정에 쫓기지 않고 내 식대로 다녔다. 평일 낮엔 공원에서 책을 읽고, 저녁엔 러닝을 하거나 스포츠 경기를 봤다. 주말엔 숲이며 바다며 와이너리며 자유롭게 투어를 다녔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관광지는 가지 않았다. 대신 로컬 마켓과 미술관, 대학교 캠퍼스를 누볐다. 현지 유학생 친구들과 테니스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해변 절벽에서 하염없이 선셋을 보면서 반나절을 다 쓰기도 했다. 무얼 하든 서두를 일도 조급할 일도 없었다. 그게 퍽 좋았다. 여행을 하는 도중에도, 너무 좋은 나머지, '이 추억에 의지해 또 앞으로 십 몇년을 살겠구나' 하는 예언 같은 생각도 들었다.


꿈 같은 여행을 가능케 해준 GM, RN, JM에게 무한한 감사를


@Los Angeles
특히 이번 여행에서는 풍경, 동물, 자연 사진을 더욱 많이 찍었다. Yosemite, LA, Irvine, San Diego 등 더 많은 미국 서부의 풍경 사진이 더 보고 싶은 분들은 인스타 참고 (링크 - 비공개지만 브런치 구독자님들께는 공개를..)



다시 돌아온 사무실, 그리고..


2주 동안 푹 쉬고 맑은 정신과 밝은 얼굴로 복귀한 사무실. 팀원들은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다들 애써 웃고 있었지만 무언가 많은 일이 일어났음을, 그 사이에 더욱 소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멘션이 안 와 있어서 놀랐다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갈등이 있었던 소규모 팀이 해체되고, 주요 담당자가 퇴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는 진행되어야 하기에 우리 팀 인원이 투입되어 이어받았다. 안그래도 업무량이 과중한데, 일을 열심히 해내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일이 몰렸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각종 일들이 문을 두드렸다. 아니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는 표현이 맞겠다. 매일 새로운 사건과 과업들이 부숴진 문 틈으로 터져 들어왔다. 어느 날은 직접 CS를 처리한다고 정신 없다가, 어느 날은 하반기 신제품 런칭 준비에 하루를 다 쓰고, 그 다음날은 면접을 보고 팀원 면담을 하느라 야근을 했다. 하루에 끝내야 하는 일, 분기 말을 보고 해야 하는 일, 내년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하는 일, 일의 경중과 우선순위가 뒤죽박죽 엉켜서 나에게 던져졌다. 하나를 풀어내면 두 개가 쌓였다. 2주간의 꿈 같던 휴가는 금세 잊혀졌다. 나는 (그 이전처럼) 한껏 예민하고 날카로워졌다. 이대로는 정말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던 와중, 회사는 성장성을 인정받아 VC 업계 1황, 알토스 벤처스로부터 series D 투자를 받게 되는데...

(다음 편에 계속)


(202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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