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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비 May 04. 2022

9. 이상한 세금계산서

판교에는 참 다양한 회사들이 있다. 처음에 주목을 받은건 대형 게임제작사들이었고, 이후에는 여러 IT 기업들과 대기업도 들어왔다. 소프트웨어 개발에 집중된 회사들도 있고, 유형의 하드웨어를 제작하는 회사들도 있다.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둘 다 개발하는 업체도 있다. 내가 속했던 그곳처럼.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은 '재료비'라는 것이 딱히 들지 않을 것이다. 회사의 비용으로 산정되는 것은 인건비, PC나 서버 등의 장비 구입비, 그 외 판관비 정도? 하지만 하드웨어를 제작하는 업체(직접 생산을 하든 외주 생산을 맡기든)라면 부품을 구입해야 할 것이고, 아트웍 디자인을 바탕으로 PCB를 만들고 하는 등의 '재료비'가 발생할 것이다. 이 재료비는 고스란히 제품원가에 반영될 것이고.


생산원가에 포함되는 요소들을 '구매'한다고 생각해보자. 보통의 절차는 이러할 것이다. 제품을 기획하고 설계한 엔지니어는 개발 내용을 바탕으로 BOM(Bill of Materials) 작성할 것이고 회사측에 BOM 맞게  구성요소를 구매해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그러면 구매 담당자가 해당 제품을 취급하는 업체(제조사 혹은 유통사) 확인하여 견적을 수취하고, 가격과 기타 조건들을 적절하게 네고한 다음 구매를 확정하게 되면 발주서를 보내거나 공급계약서를 작성하게  것이다. 이후 공급사와의 결제조건에 따라 대금 결제를 진행하면 아주 '일반적' 구매절차가 종료된다.  '일반적'이라고 강조했냐면, '일반적이지 않은' 사례를 너무 많이  왔기 때문이다.


보통 거래가 이루어질 때, 최초 거래에 대해서는 공급사가 선 입금, 후 출고 방식으로 거래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후 거래가 지속되면서 신뢰관계가 쌓이면 당월 출고분에 대한 당월말, 익월말 결제 등 일종의 '여신'을 부여한 거래를 진행하기도 한다. 내가 겪은 문제는 이 '여신거래' 업체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매월 마지막 주는 항상 바빴다. 당월말에 대외 결제를 해야하는 부분들을 정리하고 승인을 받는 일 때문이었다. 당월말에 결제해야 할 리스트를 작성하고 관리이사의 승인을 기다리던 중, 관리이사로부터 이런 내용의 회신을 받았다.


'A사는 그대로 진행해주시고 B,C는 과제비 활용 가능한 것들 확인하셔서 지정 후 진행해주세요.'


처음에는 이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국책)과제비는 그 해당 과제 전용으로 활용하는 것 아니었던가?' 아무튼,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그냥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국책과제 관리 담당자로부터 현재 예산 및 집행 가능한 항목들을 확인했고 그 내용에 맞추어 B,C사에 각각 이메일을 발송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대충 이러한 내용으로 작성했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당월 마감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서류 송부 부탁 드립니다.

 필요서류 - 견적서(x월 x자로 작성), 거래명세서 및 세금계산서(x월 x자로 작성)

 * 거래항목은 ABC 부품, 수량은 10 EA, 단가는 2백만원(VAT별도) 입니다.'


이 내용을 처음 받는 공급사 담당자는 굉장히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니, 우리가 공급한 것들은 이게 아닌데 왜 이런 요청을 하지?' 당연한 생각이다. 공급사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공급한 내용에 맞게, 출하 즉시 세금계산서를 발행해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다만 B,C사의 담당자들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많이 겪어본 듯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업무를 진행해주었다.


관리이사는 이런 업무 지시도 내렸다.


'우리 거래하고 있는 D사는 꾸준히 계속 거래할 곳이니까 집행 가능한 과제비 확인하시고 예치금 형식으로 x천만원 지급해주세요.'


이전까지 대기업에서 명확한 프로세스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던 내 입장에선 참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별 수 있나, 여기는 이런 방식으로 일 하나 보네.' 하며 그냥 넘기며 처리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로젝트를 같이 수행하던 S사의 K 부장을 만났다. K 부장은,


'솔직히 말해 봐. 우리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다른 국책 과제비 쓰고 있지?'


이야기 인 즉,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K 부장으로부터 소개받은 업체들과 거래를 트게 되었다. 이 새로운 업체들과 거래하면서 나는 관리 이사의 지시로 집행 가능한 모든 국책 과제비를 동원했고, 앞서 B,C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급자도 아닌 구매자 주제에) 세금계산서에 들어갈 모든 내용들을 거래처들에 보내어 이대로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당연히 신규 거래처 입장에서는 이상하다고 느낄 수 밖에. 그래서 이들 거래처의 담당자들이 K 부장에게 연락해서 '경우가 너무 이상하다.', '이렇게 처리해도 되느냐.', '요청사항이 너무 복잡하고 번거롭다.' 등의 컴플레인 비슷한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생각의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가정을 해 보자. 회사가 수행하는 프로젝트 중 국책 연구과제를 제외하면 딱 하나만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국책 연구과제가 아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소요되는 비용을 모두 국책 과제비로 처리했다고 생각해 보자. 회계적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눈치 챘을 것이다. 뭐가 문제인지를. '유형'의 '제품'을 판매해서 '매출'은 발생했지만 이에 따르는 '매출원가'는 0원이 되는 놀라운 상황을. 규모가 좀 있는 회사에서 이런 짓을 했다면 세무당국으로부터 바로 조사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분식회계가 별게 아니다. 이런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다 분식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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