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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ovie Critic

개인화된 관객의 시대

왜 아직도 극장이란 장소가 필요한가

by MC 워너비

얼마 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에 관해 기억에 남는 건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포털 사이트 별점평을 보면 그들은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찬욱 감독은 <어쩔수가없다>를 재미있는 영화, 대중적인 영화라고 소개하고 다녔는데 이렇게 무거운 영화가 어딜 봐서 그러느냐는 항의다. 이건 주류 관객이 기대하는 장르 성향과 감독의 작가적 취향의 불협화음이 빚은 에피소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사례가 흥미로운 건 오늘날 관객의 요구가 뚜렷해지고 세분화됐음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더 이상 관객은 박찬욱이라는 이름값만으로 영화를 보러 가거나 군소리를 감추지 않는다. 관객의 기대와 영화의 내용이 행복하게 만나는 일은 자주 실패하고 만다. 그 간극이 한국영화의 ‘위기’가 서식하는 곳이다.


팬데믹 이후 영화산업 매출은 꾸준히 하락했지만, 올해 한국 영화는 정말로 힘든 상황에 처한 것 같다. 올 상반기 극장 전체 매출액은 4079억에 관객수는 4250만이다. 각각 전년 동기 대비 33.2%와 32.5% 감소했다. 한국 영화로 초점을 좁히면 낙폭은 더 크다. 매출액은 43.1%, 관객 수는 42.7%가 줄었다. 예년에 비해서도 하락세가 급격하고, 외국 영화에 비해서도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영화 산업 이전에 한국 영화의 위기가 분명하다. 게다가 천만 영화가 두 편이 나왔던 작년에 비해 전체적인 흥행 규모가 크게 줄었다. OTT의 번성이나 비싼 티켓 가격 같은 요소를 떠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관객의 수요를 헤아리고 겨냥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요즘 극장가를 보면 관객 성향을 아우르는 뚜렷한 흥행 코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에는 가족주의와 민족주의, 신파, 사회고발이 흥행의 단추로 작동했었다. 그를 추동한 것은 단체 관람 성향을 가진 30대 이상의 관객층, 다시 말해 가족 관객이라 부를 수 있다. 천만 영화라 불리는 영화들이 그렇게 산파됐다. 이제는 팬데믹의 삭풍에 휩쓸려 그런 코드들이 가을 낙엽처럼 흩어졌다고 할까. 그 결과 ‘가족 관객’이 사라지고 관객은 극장을 떠나거나 ‘개인’으로 남게 됐다. 그것은 한국 영화가 더 이상 모두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뜻이다.


최근 화제가 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이 변화를 거울처럼 반사한다. 팬데믹 이후 흥행 영화들의 교집합은 1) 관객 동원 상한선의 하향 2) 프랜차이즈 시리즈나 원작 있는 작품을 각색한 영화 3) 특정한 장르색이 강하거나 서브컬처에 속하는 영화들이다. 오락성이 검증됐거나 가능한 익숙한 영화를 소비하는 경향이 생겼다. 무엇보다 관객 취향이 특화되고 개별화됐다. 핵심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선호되는 현상 자체가 아니다. 그들이 팬덤 기반의 IP·세계관·캐릭터 자산을 지속적으로 축적해 왔고 개인화된 2030 관객들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비주류·팬덤 문화에 속하는 ‘오타쿠 물’, 일본 애니메이션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귀멸의 칼날>이 2025년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할 만큼 말이다.


더 이상 극장은 가족과 함께 “무슨 영화를 하는지 한 번 보러 가자”라고 나서는 나들이 장소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작품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이 거기 들어 있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개인적으로 혹은 취향과 트렌드를 공유하는 지인과 방문하는 미디어 룸에 가깝다. 이 문턱은 인상된 티켓 가격과 맞물려 더 높아졌다. 10년 전과 달리 지금의 흥행을 주도하는 흐름은 일정 부분 젊은 관객들이 파생한다. 한국 영화는 이 구조 변화에 느리게 반응한 산업이다. 단적으로, 해외에선 일상화된 IP 파생 영화가 한국에는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제작되는 영화도 <범죄도시>를 위시한 소수일 뿐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애석해할 이유만은 없다. 새로운 시장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관객의 개인화는 천만 영화로 대표되는 취향의 획일화와 대조되는 현상으로 취향의 다양화를 낳았다. 오히려 일본 애니메이션들의 흥행 성적은 그 다양화된 시장의 관객 동원 잠재력을 알려주는 지표로 사용할 수 있다.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맨>의 흥행이 빚은 논란은 재편되고 있는 시장의 지각이 소란스럽게 가시화된 사건이다. 요는 그 시장의 잠재력을 한국 영화가 전유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다양화된 수요를 저격하는 데 성공하면 한국 영화도 그만큼의 흥행을 달성할 가능성이 남아있다.


이 관점을 독립 영화계에도 가져갈 수 있다. 2024년 한국 독립·예술영화는 2023년 대비 관객 수 114만에서 259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성장했다. 총선을 앞두고 개봉한 <건국전쟁> 등 정치 영화들을 제외해도 작년 대비 14% 정도 매출액이 상승했다. 올해 상반기 역시 작년과 비슷한 성과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그늘에서 양지로, 반전을 기대하며’, 영화진흥위원회). 전통적으로 독립·예술 영화계는 영화 산업이 커질 때 함께 성장하며 낙수를 얻던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인상적이게도 현재 독립 영화계는 극장 산업이 우하향하는 와중에 성과를 이뤘다. 단순 매출액만 따지면 상업 영화계와 달리 팬데믹 이전의 수치를 회복한 상태다. 해당 신에 일정한 소비자 유입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들 역시 개인화된 취향의 계층으로서 다수가 보는 영화와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는다는 뜻이다.


물론 그 뒤편에선 독립 영화 신의 상황은 좋지 않다. 영화제 지원 예산은 물론 독립 영화 지원금이 3년째 삭감됐다. 하지만 반대로 독립 영화와 상업 영화를 둘러싼 정세에 주목한다면 적극적 지원이 이뤄졌을 때 현재의 흐름이 구조적으로 진보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상업영화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서 입봉을 꿈꾸는 신인 감독들이 독립영화계로 쏠릴 개연성은 충분하다. 독립영화계가 상업영화계에 종속된 ‘하부리그’가 아니라, 다양화된 취향을 받아 안는 자생적 생태계로서 저변을 넓힐 수 있는 기회다. 나아가 새로운 인력과 실험이 쌓이면 아래에서부터 영화 산업을 재생하는 움직임을 기대할 수 있다.


꿈꾸기의 공동체로서의 극장


마지막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한국 영화가 위기이고 관객이 극장을 찾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가.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 문화를 왜 지켜내야만 하는가. 발터 벤야민은 영화는 집단적 관람의 대상으로서 영화만큼 고립된 개인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증폭되는 예술은 없다고 말한다. 영화가 품은 카메라의 이미지를 꿈에 비유한다면, 저마다의 밤을 통해 꿀 수밖에 없는 꿈을 “집단적 꿈의 형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영화 보기는 사람들의 꿈과 현실을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함께 경험하게 한다. 영화의 전개에 따라 저마다가 웃음과 숨소리, 탄성 같은 육체적 반응을 일시에 토하며 서로의 몸이 연결되는 순간을 만들어 낸다.


암전에 싸인 채 내 옆에 앉은 사람을 의식하는 긴장감 속에서, 각자의 생각을 넘어 환상과 상상, 감정과 감각을 나누는 공동체가 현현한다. 이것은 오늘날 OTT와 유튜브 같은 개인화된 미디어들이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다. 개인들이 미디어의 원룸에 고립된 사회에서 문화를 통해 서로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를 위한 거점을 확보하는 일에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흩어진 취향의 세계 속에서도, 같은 꿈을 꾸기 위한 장소에 모이는 경험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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