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 오자마자 네팔친구를 사귀었다. 현지친구 운이 백 퍼센트 작동 중이다. 그는 숙소 카운터를 보는 직원인데 매일 아침마다 한국어를 배운다고 한다. 심지어 출근하기 전 오전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알고 보니 그의 여동생도 한국어를 배운다.
카트만두에서의 첫날, 그는 일을 하루 빼고 나와 함께 유명 유적지 세 곳을 둘러보았다. 그는 한국어가 유창하진 않았지만 한국어로 대화하면 좋아했다. 아직 한국어를 배운 지 몇 달 안 됐다고 했다. 우리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대화를 했다. 그는 한국에 일을 하러 가고 싶다고 했다. 한국어 시험을 보는데 그 시험에 통과해야만 한국에 일을 하러 갈 수 있다고 했다. 영어로 대화하는 편이 서로에게 더 수월했지만 넵은 자신이 배운 한국어를 써먹고 싶어 했기에 그는 영어 대신에 곧잘 한국어도 대화를 시도했다.
나중에 한국어가 유창한 현지인 한식당 사장님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 네팔, 스리랑카, 필리핀 등지의 사람들이 시험을 봐서 통과하면 한국 정부에서 공장 같은 곳에 일을 마련해준다는 것이었다. 네팔 사람은 다른 동남아, 인도 사람들보다 인기가 있다고 했다. 마치 유럽에서 한국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처럼 성실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종족 특성 때문이라나.
그는 일 년 후에 시험을 보며, 붙을지 안 붙을지 모른다고 했다. 넵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국 사람은 친절하다고 하며, 그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외노자’가 되고 싶어 했다. 외노자, 즉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서 어떤 이미지를 지니며 통상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인 ‘사장님 나빠요’를 아는 나는 그의 들뜸이 도리어 우려스러웠다. 네팔에서보다 돈은 많이 벌 수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시작도 전에 넵의 한국생활이 걱정됐다.
인도에서 네팔을 육로로 건너온 날 숙소 옥상에서 함께 술 한잔하자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착석했다. 카트만두의 관광지를 다녀온 다음날에도 한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숙소 옥상으로 향했는데, 갑자기 연애 이야기를 꺼내더니 네팔 여자가 문란해서 자신은 싫다는 것이다. 네팔 여자가 문란하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서 의아해하던 중 그는 나에게 네팔에 계속 있다가 자기와 한국을 가자고 했다.
다소 당황했지만 그의 말을 가벼운 농담으로 넘기려는데 갑자기 대화 중 결혼을 언제 하고 싶냐 물었다.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야. 너무 놀란 나는 이상하게 흐르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급히 이 대화를 마무리해 내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방으로 돌아가야 할 핑계를 찾고 급하게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방의 잠금장치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거취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 후에 체크아웃했다.
인도에 오기 전 언어교환카페에 등록해 다양한 나라를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과 함께 영어 공부를 했다. 그중 호주 영주권과 이민권을 따기 위해 많은 돈을 들이고 영어를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영주권을 따기 위해 호주에서 전문직을 가져야 했으며, 그걸 위해 호주 대학을 졸업해야 했고, 또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에 너무나 지친 표정으로, 그냥 현지 남자나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의미 없이 던졌다. 다소 씁씁한 상황이 떠오르며 넵과 오버랩됐다.
10년 전쯤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라는 장편 소설이 인기몰이를 했다. 직설적인 제목 탓에 읽기 전에 반감부터 들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한 주인공이 이민까지 준비하는 내용이었다. 무척이나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아니 현실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도 무방했다. 소설은 사회의 한 모습을 복사기로 본뜬 것 같이 재현해 놨다. 태어난 나라와 부모는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갈 터전과 함께 지낼 사람들은 의지로 바꿀 순 있다. 저임금과 시달리는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한 단계 도약한 선진국을 부러워한다. 선진국의 대열에 겨우 합류한 나라는 문화 인프라와 복지 제도가 빵빵한(?) 나라를 부러워한다. 나라도 계급화할 수 있을까. 아마 냉철하게 그럴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가 출간됐을 시기엔 ‘헬조선’과 ‘흙수저’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였다. 살기 힘든 한국을 떠나 더 나은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 자신의 터전을 떠나 새롭게 자신을 둘러싼 터전을 바꾸는 사람들이 용기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꾸려는 시도가 멋지다. 반면 외국 생활을 견디지 못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길 원하는 사람도 있다. 고국에서 살든, 외국에서 살든 삶의 양태는 다양해서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목적과 수단을 혼동한다. 이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것이다.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 하지만 이민은 곧 목적이 되었다. 닿을 수 없고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라 더 애가 탄다. 원래는 수단이었지만 목적으로 둔갑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또 다른 도구가 필요하다. 다만 그 도구로서 사람과 행복의 열쇠를 쥔 결혼을 언급할 정도로 절실한 상황이 나로선 씁쓸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