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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디 Nov 02. 2022

빈곤과 도덕

101일간의 좌충우돌 인도, 네팔 여행기



어쩌다 동행을 따라 계획에 없던 석가모니 탄생지와 석가모니가 열반에 이르렀다는 불교 성지 두 곳을 가게 됐다. 그곳은 바로 네팔 룸비니와 인도의 쿠쉬나가르. 그곳에는 열렬한 불교신자들이 성지순례를 하고 있었고, 각국의 사원들이 각 나라마다 특색 있게 지어져 있었다. 룸비니에서는 한국의 대성석가사, 쿠쉬나가르에서는 미얀마 템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절의 리듬에 맞추느냐 이른 시간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성스러운 지역이라는 이미지와 별개로 쿠쉬나가르 길거리에는 집이 없어 보이는 아이들과 여자들이 주르륵 내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헝클어진 머리에 꾀죄죄한 몰골로 있다가도, 우리와 같은 관광객이 지나가면 신발도 없는 맨발로 졸졸 따라다니며 구걸했다. 보통 불교 경전을 외면서 쫓아와 신자들의 동정심을 자극했고, 한 구역마다 서너 명의 아이들이 달라붙었다. 생각보다 끈질겼지만 자신의 구역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원래 있던 곳으로 뛰어서 돌아갔다.



한쪽에선 단정하게 머리칼을 빗고 말끔히 교복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자전거를 탄 이들은 초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아이들 특유의 장난기 서린 웃음도 배어있었다. 그때 마주 편으로 허름한 옷을 입은 아이가 지나갔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였다. 그는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지나가면, 꺾은 풀을 던져 해코지했다. 한 공간 안에서도 극심한 빈부 격차가 피부로 느껴졌다.



시커먼 얼굴의 빈민들 속에서 뽀얄 정도로 새하얀 덩어리 같은 물체가 아른거렸다. 알고 보니 벌거벗은 아이였다. 아이는 둘이었는데, 하나는 남자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여자 아이였다. 표백을 한 것처럼 하얗게 뽀얀 피부의 남매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3초 뒤 다시 놀랐다. 이곳에서는 태어날 수 없는 색의 아이였기 때문에. 같이 있던 일행도 아무 말 못 하고 동시에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너무 놀란 나는 무슨 일인지 연결고리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동행에게 힘없이 물었다.


“아마 서양 여행객들이 이곳의 여자와 놀다 그냥 버리고 간 거 아닐까요”


그도 꽤 많이 놀란 모양이었지만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의 충격을 받은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 고난을 모른 채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상반되고 이질적이라 더욱 절망적인 마음을 금치 못했다. 학교도 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길거리를 거실 삼아 내앉은 여자들(이 와중에 남자들은 보이지 않았다)과 아이들. 심지어 너무나 확연히 구별되는 피부색, 그리고 눈동자의 빛깔. 저 아이들의 미래와 안위는 누가 책임지는가. 한낱 여행자의 괜한 오지랖일까. 이 아이들의 미래의 고통이, 정체성의 혼란이, 뿌리에 대한 원망이 내게 전해져 왔다.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불교 사원으로 입장했다. 사원 안에는 꽃을 무료로 나눠주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발 꽃을 받으라고 공짜라고, 지독하고 끈질기게 쫓아왔다. 내키지 않았지만 못 이기는 척 결국 받았다. 한참을 구경하고 사원을 나가려고 할 때쯤 어디 있었는지 꽃을 준 아이들이 찾아와 꽃을 줬으니 돈을 달라고 떼를 썼다. 나는 너희가 공짜라고 했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더 이상 어린아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빛이었다.



나의 동행이 말했다. 어른들은 몰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은 너무 하지 않냐고. 내가 이래서 종교를 가지지 않는다고.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아이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돌아가는 길 내내, 거의 그날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쿠쉬나가르에서 처음 마주한 빈민들의 모습은 내가 살던 시대의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인도 내에서도 목격하지 못한 가난이었다. 생경한 만큼 더 가슴이 아팠다. 사실 그 아이들이 내게 바란 돈은 큰돈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고작 몇 백 원 혹은 몇 천 원 되는 돈이었다. 그 돈을 단지 건네주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내게 거짓말을 한 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돈을 주는 일은 다른 일이었다. 과연 그 행동이 옳은지 싶었다. 그 아이는 또 그런 방식으로 돈을 얻어낼 테니까.



옆에 있던 사람도 단호했다. 절대 돈을 주지 말라는 반응이었다. 나보다 연장자인 그의 말을 따라야할 것 같은 생각에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  나의  행동이 과연 맞는지, 아이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계속 마음속으로는 내적 갈등을 벌였다. 내가 돈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는데. 어쩌면  아이들이   있는  그것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 것은 아니었을까 후회가 된다.



 모든  섣부른 동정이자 배부른 자가 하는 상상일까 싶다. 머리가 복잡해온다. 어쩌면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인도에서는 자주 번뇌의 순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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