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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준 Apr 24. 2021

모네와 르누아르

    초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두 간판 모네와 르누아르가 젊었을 적부터 친한 친구였단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누구의 아뜰리에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모네가 노르망디에서 파리로 넘어오고 그림을 배우기 위해 들어간 아뜰리에에서 르누아르를 처음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부터 둘은 단짝 친구로서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다. 이들에게 수업은 늘 지루하기만 했고, 때문에 허구한 날이면 바깥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파리 외곽으로 나가기 일수였다

같은 장소에서 그린 모네의 "라 그르누이에"(왼쪽)과 르누아르의 "라 그르누이에"(오른쪽)

    하지만 이러한 나날도 이들에겐 그저 젊은 시절의 추억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늘어나는 가장의 무게(?)는 두 화가가 각자의 길을 걷도록 만들어 주었다. 사이는 여전히 돈독했지만 인상파에게 쏟아지는 혹독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두 화가는 서로에게 맞는 각자 다른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때가 1880년대 초이니 이들의 나이가 어느새 약 40살에 접어들었을 무렵이다.


    그런데 이때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다. 때는 1883년 12월, 모네와 르누아르가 지중해 연안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두 화가는 남프랑스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고자 짧은 일정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왜 하필, 추운 12월이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그곳에서 늘 그랬듯 그림을 그리는데, 모네에게 갑자기 문제가 생긴다. 영국, 네덜란드, 파리 등 줄곧 북쪽 지방만 여행해오던 모네에게 남쪽의 뜨거운 햇살을 그려내는 일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반면, 르누아르는 일전에 알제리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한 경험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모네는 찝찝함만을 남긴 채 짧았던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3주가 지난 뒤, 집념의 모네는 르누아르에게 소식을 알리지 않은 채, 남프랑스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이 때 모네는 두 화가의 후원가였던 '뒤랑 뤼엘'에게 자신이 떠났다는 소식을 르누아르에게 알리지 말라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혼자 있을 때만큼 나만의 인상을 잘 나타냈던 적이 없는 것 같네요.

    그동안 수많은 작업을 함께했던 르누아르가 이 말을 직접 들었더라면 아마 꽤나 서운했을 것 같다. 하지만 모네가 떠났다는 소식을 알아차린 르누아르는 제법 쿨하게 이 상황을 넘긴다. 모네가 남프랑스로 떠난 지 몇 주가 지난 뒤 어느날, 르누아르에게 남쪽으로 내려오라는 내용의 편지가 모네로부터 날아온다. 하지만 그는 모네의 초대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래와 같은 내용의 답장을 전했다고 한다.


난 요즘 지루한 파리에 갇힌 기분이야. 찾아내기 힘든 모델 꽁무니만 줄줄 따라다니고 있어. 그런데 어쩌겠니, 난 인물화가인걸! 가끔은 이 사실이 만족스러운데, 마음에 드는 모델이 안보일 땐 아니더라.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모네와 르누아르가 밟게될 '마이웨이'를 예감할 수 있다. 훗날 '빛의 화가'라 불리게 될 모네는 빛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인 '자연'에 주목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풍경화를 만들어낸다. 반면, 르누아르는 편지에서와 같이 '인물'에 주목한 화가다. 그는 '행복의 화가'라 불리며 인물화에서 인간의 행복한 감정을 끄집어내려 했다. 이렇게 늘 붙어 다니기 일수였던 두 화가는 나이가 40대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각자의 길을 밟아나가며 서로 다른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모네의 풍경화(왼쪽)와 르느와르의 인물화(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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