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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준 Sep 19. 2020

프렌치드림을 쫓아온 사람들

폴란드편

    프랑스 북쪽 지방은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어둡다. 짓궂은 날씨 때문이기도 하고, 이 곳의 탄광촌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부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영국의 광맥이 바다를 뚫진 못했을 터, 대륙인들은 새로운 광맥을 찾아야 했는데 그 시작점이 벨기에서부터 였다고 한다. 이 광맥이 바로 북프랑스까지 이어져 프랑스에 산업혁명이 본격화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탄광촌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다. 19세기 후반, 처우가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위험을 무릅써야만 할 수 있었던 광부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은 점차 많은 외국인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한다. 1930년 기준, 섭외 1순위는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벨기에인들이었다. 그런데 2순위가 우리로선 조금 의외다. 바로, 폴란드인이다.

   폴란드는 서유럽에 익숙한 이들에겐 조금 낯선 나라일 수 있다. 독일 옆에 제법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폴란드는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외세의 침입이 아주 잦았던 나라다. 바다 건너 북쪽엔 스웨덴이 있고, 왼쪽엔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이 있었으며, 오른쪽엔 러시아가 있었다. 19세기에는 어떠했을까? 나폴레옹의 영향력이 사라진 폴란드 땅에 러시아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못마땅해한 일부 폴란드인들은 일명 '자유'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로 망명을 오게 되는데 그때부터 파리는 폴란드의 2번째 수도로 불리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우리가 알고 있는 '쇼팽'과 같은 예술가들이 파리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세기 후반, 이번엔 종교의 자유를 외치는 프랑스로 많은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넘어온다. 이 이주민들 사이에는 미래의 과학자가 될 퀴리부인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20세기에 이르게 되면 모두가 아는 것처럼 유럽은 세계대전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낳은 프랑스는 외부인력을 찾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폴란드였다. 마침 독일에서의 성공담을 듣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외국 진출을 꿈꾸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1931년 기준, 약 5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폴란드인들이 프랑스로 넘어오게 된다. 그들 중 많은 숫자가 탄광촌으로 향했다. 1920년 기준, 약 19만 명이 북프랑스로 넘어온다. 이제 그들을 위한 집이 필요할 때다. 탄광촌은 탄광회사의 책임이었다. 회사가 자체적으로 고용한 건축가를 통해 주거시설뿐만 아니라 편의시설 등이 만들어진다. 아이들을 위한 학교부터 시작하여 스포츠센터까지 생길 정도였다니 탄광촌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우울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탄광촌의 모습. 이러한 탄광촌의 주거형태를 Coron(코롱)이라 불렀다.

    시간이 흘러 목표를 달성한 이들은 짐을 챙겨서 조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남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3대에 걸쳐 탄광촌이 있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북프랑스의 중심지인 Lille(릴) 인근에는 Douai(두에)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 곳은 과거 이 지역을 대표하는 대학(현재의 릴 국립대학의 전신)이 위치해 있을 정도로 번화한 도시였는데,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광부들의 베드타운으로 변신하게 된다. 탄광촌은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20세기 초반, Douai 기차역 바로 뒤에 있는 Waziers 마을에 수갱이 뚫리면서 그 주변에 탄광촌이 형성된다. 오늘날, 이 곳에는 이 지역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성당 중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Notre Dame de Waziers (바지에 노트르담)


    지역말의 영향으로 W가 비읍 발음이 난다. 따라서 바지에 노트르담(성당)이라 부른다.

    붉은색 벽돌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전통적으로 지반이 낮아 집을 짓는 데에 점토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며, 산업화로 인해 대량생산이 이 지역에서 가장 활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 꽤나 이름을 날린 건축가 Louis Maire Cordonnier(1854-1940)의 1927년 작품이다. 종교 건물답게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쌍의 창문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 성당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중앙 제단
난로

    내부의 모습은 마치 광산에 만들어 놓은 갱도의 모습과 같다. 양쪽 끝에는 난로가 보인다. 이 주변 탄광에서 생산되는 Coke(코크스)로 이 난로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고 한다. 중앙 끝에는 제단이 보인다. 그 가운데에는 이 성당이 누구를 모시고 있는지 나타나 있다. Notre-Dame(노트르담: 우리의 부인), 다시 말해 성모의 모습이 스테인드글라스를 꾸미고 있다. 성모의 양쪽에는 광부들의 수호성인인 Barbe, 제련, 금속 업자들의 수호성인인 Eloi가 서있다. 사진 속에 보이진 않지만 우측 제단에는 노동자들의 수호성인인 Joseph 조각상이 놓여있다.

   이렇게 이 성당은 이 지역에서 일했던 모든 광부를 위해 만들어진 성당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날 이 성당을 폴란드인들의 성당이라 부르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큰 피해를 입게 된 탄광은 국가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가게 되고, 폴란드인들이 떠난 자리를 마그레브인들(알제리, 모로코, 튀니지)과 이탈리아인들이 채우게 된다. 1990년 기준, 북프랑스에 남아있는 폴란드인들은 고작 만여 명뿐이었다고 하니, 이제는 더 이상 이 동네를 폴란드인들의 땅이라 부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석유시장이 커지면서 탄광은 결국 문을 닫는다. 이렇게 성당은 탄광촌과 함께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성당은 제법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복원할 돈이 없었고 부서진 종탑 사이로 많은 비둘기들이 들어와 성당을 더럽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익명의 기부자가 나타난다. 2000년, 성당을 지키던 폴란드계 Wojtyla 신부님에게 전화가 한통 걸려온 것이다. 이 익명의 기부자는 자신의 기부금이 복원사업을 위해 쓰이길 원했다. 물론,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성당이 속해있던 교구의 반대로 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신부님은 시민단체를 만들기로 정한다. 당시 이 지역에 남아있던 폴란드계 프랑스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종탑이 다시 세워지고, 부서진 창문이 교체되었다. 이렇게 15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통해 성당은 외부의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고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반갑게도 201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


2002년 8월 폴란드 시민단체의 사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인

    오늘날, 새로 교체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들을 살펴보면 복원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중에서 옛 교황의 이름이 보인다는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Le Pape Jean-Paul II). 그는 Wojtyla 신부님의 사촌으로서 같은 폴란드 출신이었다. 그도 역시 이 복원사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렇게 흔적이 남겨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교황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신부님의 활약 덕분에 2014년, 교황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만에 그의 성물이 이 성당에 모셔지게 되고, 아직까지도 매달 2일이 되면 그를 위한 미사가 치러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 신도들은 성당으로서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바실리카’로의 승격을 꿈꾸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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