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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보낸 느린 편지>

글 : 김세린

느린 우체통에 편지를 부치면 빠르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뒤에 편지가 도착한다. 국내 관광 명소에서는 이 느린 우체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필자는 매해 느린 우체통으로 1년 뒤의 나에게 느린 편지를 보낸다. 물론 느린 편지를 자신에게만 쓰라는 법은 없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느린 편지를 보낸다면 그걸 받은 상대는 예상치도 못한 이벤트에 감동받을 것이다. (그 때 까지 좋은 관계가 지속된다면 말이다..) 반대로 누군가가 보낸 느린 편지를 내가 받는다면? 사실 우리는 꾸준히 느린 편지를 받고 있다. 저기 별로부터 말이다!

<출처 : Unsplash>

별이 보낸 편지는 별빛이다. 이 별빛은 집배원 없이 스스로 우주 공간을 날아서 우리에게 배달된다. 하지만 별이 보낸 편지는 순식간에 오는 것이 아니다. 빛의 속도는 일정하기 때문이다. 지구와 별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어서 빛이 아무리 빨라봤자 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보는 공간의 크기는 빛에게는 상대적으로 매우 작아서 마치 순식간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공간을 우주로 확장해 보자. 빛의 속도는 순식간은커녕 아주 느린 것처럼 느껴진다. 빛은 고작 1초에 30km밖에 가지 못한다. (30km는 서울-부산 거리의 658, 지구 둘레의 7.5배이다.)

<출처 : pixabay>

별은 사실 의도적으로 느린 편지를 부치는 것이 아니다. 별과 지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편지가 늦어지는 것이다. 그들의 편지를 빨리 받아 보면 좋겠지만 이 세상 물리 법칙에게 항의할 순 없으니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사실 기다릴 필요는 없다. 밤하늘을 보면 별들에게서 온 편지들이 이미 많이 있다. 우린 그저 오랜 시간 날아와 이미 도착한 별의 편지를 뜯어보면 되는 것이다.

<출처 : pixabay>

별은 우주 공간에 흩뿌려져 있어서 지구와 가까운 별도 있고, 멀리 있는 별도 있다. 그렇다면 멀리 있는 별일수록 편지는 늦어질 것이다. 우리가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들은 가깝게는 수 광년, 멀게는 수천광년 까지 떨어져 있다. ‘광년은 빛의 속도로 1년 동안 간 거리(9.46×10^12km: 이는 지구와 태양 사이 거리의 6324)이다. 그렇다면 우리로부터 n광년 떨어져 있는 별빛은 n년 전 출발한 빛이다. 지금 n광년 떨어져 있는 별을 보고 있다면 그 별빛은 지금으로부터 n년 전 모습인 것이다. 참고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인 태양의 빛이 지구까지 오는 데는 8.31분이 걸린다. 우리가 지금 보는 태양은 8.31분 전의 태양인 것이다.

<출처 : pixabay>

오늘 우리가 보는 별들의 모습이 존재했던 때, 그 시각 지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지금부터 별들에게서 온 느린 편지들을 하나씩 뜯어보자.

<출처 : pixabay>
<출처 : APOD>

먼저 태양계와 가장 가까운 별, 센타우리 알파 프록시마로부터 온 편지를 보자. 프록시마는 지구로부터 약 4광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오늘(2019년 기준)로부터 4년 전은 2015, 우리는 오늘 2015년에 출발한 프록시마의 빛을 보고 있다. 그 해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로 떠들썩했고, 아이돌 여자친구, 오마이걸, 트와이스가 데뷔했다. 그리고 태양계 외곽에서는 뉴 호라이즌스호가 명왕성의 최근접점을 통과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2010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의 무대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queenyuna/6784989012>

다음은 우리에게 익숙한 별, 시리우스가 보낸 편지이다. 시리우스는 지구로부터 약 9광년 떨어져 있으므로 오늘 보는 시리우스의 빛은 9년 전인 2010년에 출발한 빛이다. 그 해 지구에서는 벤쿠버 동계올림픽이 개막했으며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애플사에서 아이패드를 첫 출시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천안함 침몰 사건이 있었다. 장동건-고소영 커플이 결혼식을 올렸으며 아이돌 미스에이, 인피니트가 데뷔했다. 또 아이유의 <좋은날>로 대한민국에 3단 고음 열풍이 불었다.

<출처 : CERN>

겨울철 대삼각형을 이루는 작은개자리의 밝은 별 프로키온은 약 11광년 떨어져 있다. 프로키온의 빛이 떠나온 11년 전인 2008년에 지구에서는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했다. 그리고 그 해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LHC(대형 강입자 충돌기)가 가동돼 전 세계 과학자들이 주목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숭례문 방화 사건과 광우병 소고기 수입으로 국민들은 분통했다. 또한 호주제가 폐지되었으며 아이돌 샤이니, 2pm, 다비치가 데뷔했다.

여름철 밝은 별로 여름철 대삼각형을 이루는, 직녀성 베가가 보낸 편지이다. 베가는 지구로부터 약 26광년 떨어져있으므로 오늘 보는 베가의 빛은 26년 전인 1993년에 출발한 빛이다. 그 해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대전엑스포가 개막하고 마스코트 꿈돌이가 어린이들에게 사랑받았으며, 1차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되었다.

<출처 : NASA>

목동자리의 별, 아크투루스는 봄철 대곡선을 이루는 밝은 별이다. 아크투루스는 약 36광년 떨어져 있으며 오늘 보는 아크투루스의 빛은 36년 전, 1983년에 출발한 빛이다. 그 해는 천문학자 찬드라세카르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해이며, 미국에서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와 챌린저호가 비행을 하던 시기이다. 우리나라는 전두환 대통령이 재직 중이었으며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첫 방영되었고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있었다.

피난길에 오르는 사람들 <출처 : wikipedia>

황소자리의 가장 밝은 별 알데바란은 약 68광년 떨어져 있는 별이다. 오늘 보는 알데바란의 빛은 1951년의 빛이다. 이 때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가족이 피 흘리고 굶주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빛에 대한 물리법칙은 지구 반대편인 알데바란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구에서 알데바란의 68년 전 모습을 보는 것처럼 알데바란에서도 68년 전 지구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알데바란이 상징하는 황소의 눈은 지금쯤 황폐화된 한반도를 보고 있지 않을까.

네이처의 첫 기사 <출처 : wikipedia>

가을철 대사각형을 이루는 페가수스자리의 밝은 별 마르카브는 약 150광년 떨어져 있다. 따라서 오늘 보는 마르카브의 빛은 150년 전인 1869년에 출발한 빛으로 그 때 우리나라는 고종이 재위하고 있던 조선시대였다. 인도에서는 간디가 태어났으며 미국에서는 북미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었다. 영국에서는 과학 저널 네이처가 처음 출판 되었다.

영조의 어진 <출처 : wikipedia>

처녀자리의 밝은 별 스피카는 약 250광년 떨어져 있는 별로, 오늘 보는 스피카의 빛은 1768년의 빛이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영조가 재위하고 있던 조선시대였다. 이 때는 임오화변(1762) 이후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겨울철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 딥스카이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약 444광년 떨어져 있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의 빛은 1575년의 빛으로 그 해 지구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셰익스피어, 조르다노 브루노가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로 선조가 재위하고 있었으며 이순신, 율곡 이이, 허난설헌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광해군이 태어났다.
















전갈자리의 붉은 별 안타레스는 약 600광년 떨어져 있으며 오늘 보이는 안타레스의 빛은 600년 전인 1419년의 빛이다. 그 해 우리나라는 세종대왕이 재위하고 있던 조선시대였으며 대마도정벌이 있었다. 그 때 유럽에서는 백년전쟁 중이었다.

세종대왕의 어진 <출처 : 서울시 50플러스 재단>

여름철 대삼각형이자 백조자리에 있는 데네브는 무려 1600광년이나 떨어져있다. 1600년 전인 419년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였다. 고구려는 장수왕이 재위하던 시기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백제는 전지왕이, 신라는 눌지 마립간이 재위하고 있었다.


문득 밤하늘을 보다가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본다면 느린 편지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 당신이 보고 있는 별이 언제 적 모습일지, 그 때 지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누가 살고 있었는지 호기심을 갖고 알아본 다면 나름대로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나아가 그 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회상하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또한 당신 곁의 소중한 사람과 기념하고 싶은 날로부터 9년째 되는 날 시리우스를 함께 보는 건 어떨까? 어떤 방식이든 별이 보낸 느린 편지를 읽어준다면 별이 가진 낭만을 좀 더 깊이 볼 수 있는 당신이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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