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숲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숲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공생하고, 상호작용할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숲에 어울리고 싶은 것뿐인데, 너무나 가혹한 것을 요구한다.
나는 공생할 줄 모르고, 상호작용할 줄 모른다.
숲에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내가 무언가를 내어주어야 할 때, 내어준 것을 거절당할 때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숲은, 숲에 이미 적응한 사람들은 쉽게 내어주고, 쉽게 거절하고, 쉽게 표현한다.
그들은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내뱉는 단어들을 내 가슴에 박아 흐르는 피를 양분으로 삼는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착각하는 것일지도. 너무나 숲을 벗어나고 싶은 나머지 환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고, 불투명하다. 어쩔 땐 너무나 따스하다가도 금세 가시덤불로 변해버리는 것이 숲이다. 숲에서는 햇빛을 쬐고 행복해하는 것이나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찌 됐든 웃어야 하니. 고통의 숲에서 겨우 찾은 내 안식처로 돌아가더라도, 가끔씩 불편한 잠자리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벗어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출구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숲이 주는 고통에 적응해버려 숲 밖의 세상이 나에게 더 큰 고통을 줄지, 행복을 줄지 확신할 수 없어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숲에 머물 수밖에 없는 처지기에 숲이 주는 조그마한 산들바람이나 희미한 햇빛에도 크게 감사하고 행복해할 수밖에 없다.
숲에게 비굴한 내 모습을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숲에게 굴복한 내 모습을 저항 없이 받아들인 지 오래다. 너무 힘들어 어딘가에 기대고 싶을 땐 누가 들을까 걱정하며 내 잠자리 옆 작은 풀에게 끊임없이 속삭인다. 풀이 내 말을 듣고 있는지, 풀 역시 가시로 변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속삭이고 본다. 숲은 후의 일을 생각하고 걱정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가끔 어리석게도 큰 나무들이나 사람들에게 말을 걸 때도 있다. 그들에게 나의 속마음을 말한다. 말하는 순간에도 후회를 하지만, 스스로가 속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이며 말을 걸 때가 있다. 몇몇은 대답해 준다. 숲에 적응했단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귀 기울이는 척이라도 해 나에게 거짓 위안을 준다. 몇몇은 귀를 닫고 입을 닫는다. 그들은 숲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에게만 귀를 기울이고 대답을 해준다.
숲 속의 가장 어두운 면은 내가 숲의 부적응자면서 동시에 큰 나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기준에서 풀은 풀이고, 큰 나무는 큰 나무다. 하지만 풀의 기준으로 볼 때 작은 벌레들이 내가 생각하는 풀이고, 내가 풀에게 큰 나무가 될 수 있다. 내가 힘들 때만 풀에게 매달리고, 평소에는 큰 나무에게서 소리가 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숲의 적응자, 부적응자, 풀, 땅 속의 하찮은 미생물이 될 수 있다. 나 자신이 숲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 자신이 큰 나무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을 확정 짓고 싶지 않아 가정하듯이 말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숲을 혐오하면서 숲에 진정으로 소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용기가 없기에, 숲 밖으로 나간 사람들을 동경하면서도 겉으로는 무모하다고 손가락질한다. 숲 밖에서 날아온 새가 숲 밖의 세상에 대해 속삭여도 내가 직접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숲의 부적응자도, 적응자도 되고 싶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풀의 형태로든, 큰 나무의 형태로든 숲에 적응해간다. 소속되어 간다. 보이지도 않는 올가미에 걸려 있는 듯 일부로 착각하며 스스로 고통받는다. 천천히 숲에게 먹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