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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ke Crazy Jan 02. 2022

행복한 외출이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길

안녕, 내 찌질하고 무능했던 20대

내 삶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덕목이 있다면 그건 '성실함'일 것이다. 어릴 적부터 약간의 운동신경 외에는 별다른 재능을 발견할 수 없었던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였다. 외국어엔 젬병이었고, 약간의 난독증으로 한국어로 된 책조차 읽기가 버거웠다.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내는 능력도,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능력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공부라도 잘해보자는 생각을 하였고, 이 악물고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아무 공부법 없이 잠 3-4시간을 자면서 닥치는 대로 외우고 문제 풀기만 하였고, 운이 좋게도 전교 이과 3등을, 그다음 학기에는 2등을 하였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정말 정말 운이 좋게도 지원한 모든 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대를 마친 내 내면에는 '성실함'만이 내 살길이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성인으로서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삶에는 커리어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똑똑한 친구들은 노는 것도 열심히 놀고, 자기 챙길 것도 잘 챙기고, 그리고 가끔은 게을러지며 여유도 부린다. 그런데, 내게는 언제나 그런 '여유'가 없었다. 이미 뒤처졌고 게으름 피웠다가는 더 뒤처질 것이라는 불안감, 고등학교 때 채우지 못했던 능력들을 뒤늦게라도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에 쉬는 것이 언제나 불편했고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는 내 귀한 시간을 팔아 푼돈 버는 것이라 생각하여 돈 버는 일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그런 내게 9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해준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녀도 나와 같이 큰 꿈을 품은 이상주의자였고, 그런 점이 잘 통했다. 그녀는 내 성실함을 높이 샀고, 내 꿈을 믿어줬다. 우린 모든 것을 소통했고, 함께 꿈을 꾸었고, 서로에겐 최고의 친구이자, 가족이자, 동반자였다. 그녀 없이는 내 20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내 삶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관계에 미숙해도 너무 미숙한 내게 연애 또한 결코 순탄하진 않았다. 남녀 간에는 사고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 내가 무조건 맞춘다 해서 건강한 관계가 될 수 없다는 점, 모든 것이 논리로만 통하진 않는다는 점,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할 수 있다는 점,.. 건강한 연인관계를 배우고 깨닫는데 참으로 많은 다툼과 반성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그 과정에도 나의 참 속좁고 찌질했던 순간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를 이해하고 내 발걸음을 맞추려 노력해주었다.


학부연구생으로 연구를 시작하면서부터 내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은 극에 달했고, 우리의 갈등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다. 연구 프로젝트의 호흡은 굉장히 긴 편이었고, 일과 삶의 분리가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언제나 연구실에만 있고, 일요일은 물론이고 토요일에도 학교에 있었다. 비록 매일 영상통화를 하더라도, 항상 시간에 쫓겨 초조한 내 모습을 그녀는 보고 있어야 했다. 데이트 또한 주말에 겨우 할 수 있었고, 하루 종일 데이트하거나 여행을 가는 날에는 연구 생각이 서려 있는 내 표정을 봐야 했다. 언제나 나는 내 가장 가까운 연인과의 시간조차 즐기지 못한 채, 거대한 이상만 좇아 허둥지둥 달려가기에만 바빴다. 우리는 이런 일로 종종 다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녀는 나를 이해해주고 언제나 응원해주었다.


그러나 내 이상주의의 한계는 취업 준비를 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들 다하는 영어성적이나 기사 자격증을 따는데 내 시간을 허비하는 게 언제나 아깝다 생각했고, 나와는 무관한 일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언제나 내 스토리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회사 입장에서는 이러한 객관적인 지표들은 지원자들을 평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이었고, 이 최소한 요건조차 충족하지 않은 사람들을 뽑기에는 경쟁이 너무도 치열하였다. 무엇보다, 내가 쌓아온 스토리와 역량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가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최소 5년 간의 실무경험 가진 경력직을 필요로 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지원한 대기업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는 열심히 달려왔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그저 비전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신입 지원자일 뿐이었다. 나는 내 이상에만 자아도취했던 것이다.


나를 가장 가까이서 본 그녀 또한 나만큼 당황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가 큰 비전을 갖고 쉴 틈 없이 달려온 만큼 사회에서 당연히 승승장구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기업에 취업하면 첫 월급으로 그녀에게 사주기로 약속했던 명품백의 액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나처럼 큰 이상을 꿈꾸고 있는 중견기업에 취업하면서 선물은 소박한 스타일러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꽤나 만족해주었다.


지난 10년 간 얻은 큰 수확은 오직 내 힘으로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수능 대신 일본 국비유학 장학생에 관심이 있을 정도로 해외 유학에 대한 로망이 어릴 적부터 있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학비와 생활비를 부모님께 의존할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비교적 장학제도가 풍부한 박사과정을 목표하게 되었다. 석사과정을 마칠 즈음 좋은 기회로 무심코 미국 대학원에 지원하였고, 다행히 대학원 측에서는 나의 독특한 경험과 비전을 높이 샀고, 덕분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을 허가해주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나는 내가 늘 꿈꾸던 대로 30대는 해외에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거대한 변화 중 참으로 쓰리는 점은 그녀 또한 텅 비어버렸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뉴욕은 언제나 그녀가 꿈꾸던 도시이기에, 대학원 합격 당시 유학 자체보다는 그녀와 함께 해외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뻤다. 그러나, 그녀는 지난 9년간 끊임없이 달려온 결과가 월급이 쥐꼬리만 한 중견기업 취업이라는 것에 실망했는지, 아니면 지난 9년뿐만 아니라 앞으로 5년도 돈 한 푼 모을 수 없는 학생 신분이라는 것에 답답했는지, 머지않아 이별을 고했다. 뭐가 되었든 내가 결혼상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 20대 전부를 차지하던 그녀이기에 이 거대한 구멍을 과연 무엇으로 메꿔야 하는지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2021년 20대 마지막 날에 꾸었던 기묘한 꿈이 유난히 눈에 아른거린다. 나는 그녀와 작은 방에서 심하게 다투었다. 그 공간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그녀의 옛 자취방만큼 매우 작았고, 우리가 지내온 공간이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아주 치열하게 다툰 다음 날 다시 그 공간에 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옷도, 소품도, 가구도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사라진 채 나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결과적으로 새로 서른을 맞이한 지금 시점을 돌아보면, 뉴욕이라는 새 환경 외에는 스무 살 때와 변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몰래 리셋버튼을 누른 것처럼 경제적으로도, 연인관계도, 인간관계도, 내 커리어도 모두 초기화가 되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처럼 지금도 무엇을, 어떻게 쌓아 올려야 할지 여전히 막막할 뿐이다.  


내 지난 20대를 떠올려보면 애틋하고 가슴이 저려온다. 그럼에도 누군가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대답할 것 같다. 막연한 이상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그 어느 것도 명확히 쟁취하거나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이 찌질하고 무능하게 느껴질 뿐이다. 30대에는 더욱 독하게 살아가길, 그리고 더욱 확실한 것들을 챙길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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