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
뉴욕에서 첫 새해를 맞이하였다. 왠지 모르게 일출을 보고 싶은 마음에 적당한 명소를 찾다가, 우연히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촬영지인 Montauk이 뉴욕에 있음을 알게 되었고, Montauk으로 가는 길에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았다.
살다 보면 지우고픈 기억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중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은 사랑했던 연인과의 추억일 것이다. 그 사랑스러웠던 추억들은 이별을 통해 아픔, 분노, 부끄러움, 그리고 안타까움과 뒤섞여 버려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만약 우리가 그 기억을 지울 수만 있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우리는 정말 그 기억들을 지우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조엘은 사랑했던 연인인 클레멘타인과 이별을 했다. 감정적인 부분이 컸기에 화해를 하고자 했고, 밸런타인데이 3일 전에 선물을 사서 그녀가 일하는 서점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고, 어떤 다른 남자와 반갑게 키스를 한다.
혼란스러운 조엘은 친한 친구 커플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았는데, 그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준다. 그 커플은 한 병원으로부터 클레멘타인이 조엘을 기억에서 지웠으니, 클레멘타인에게 둘의 관계를 언급하지 말라는 편지를 받은 것이다. 조엘은 결국 그 병원을 찾아갔고, 담당 의사로부터 클레멘타인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을 지우고 싶어 했다는 말을 듣는다.
충격을 받은 조엘은 복수심에서인지 본인도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녀와 관련된 사진, 옷, 선물 등 모든 것을 병원에 가져갔고, 그날 밤 조엘이 집에서 자는 동안 전문가들은 그의 집에 들어와 장비들을 설치하고 기억을 삭제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크게 다툰 후 그녀가 집을 나갔던 가장 최근 기억부터 조엘의 기억은 하나하나 지워져 간다.
그러나 문제는 기억에는 권태와 증오의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와 침대 위에서 도란도란 나눴던 기억도,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누워서 사랑 고백을 했던 기억도, 그녀를 그림 그려주던 행복한 기억들 모두 삭제되어 간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손을 붙잡고 그녀가 존재하지 않았던 어릴 적 기억 속으로 도망쳐 간다. 그리고, 그것도 통하지 않자 가장 수치스러웠던 기억까지 숨어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마저 통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까지 다다랐다. 친구에게 끌려오다시피 했던 Montauk 해변에서 그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과거에 그랬듯이, 그녀는 그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조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기억마저 곧 지워질 것이라는 것을. 그 순간 조엘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남아있는 기억의 조각 하나하나들을 그저 즐기는 것뿐이다.
기억이 모두 지워진 후, 조엘은 일어나 평소처럼 출근을 한다. 그러나, 문득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출근을 땡땡이치고 Montauk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본인도 모른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Montauk 해변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한 여자와 만나 대화를 하게 되고, 금방 사랑에 빠진다. 사실, 사랑에 빠진 그 여자는 전 연인인 클레멘타인이다. 그도 그녀도 이전에 만난 기억은 지워졌지만, 그 둘은 왠지 모르게 그들이 처음 만났던 Montauk으로 이끌렸고, 다시 서로에게 끌렸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 고백을 하던 그 호수 위에서 또다시 추억을 쌓는다.
그들은 호수 데이트 후 돌아가는 길에 한 편지를 읽게 된다. 기억을 지웠던 병원에서 일하던 직원이 보낸 것이다. 그들은 기억을 지울 당시 그들이 녹음했던 테이프를 함께 듣게 된다. 그리고, 서로가 사랑했던 연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서로에게 증오만 남았던 당시의 테이프를 들으며 다시 상처를 받았고, 클레멘타인은 다시 만난다 해도 예전에 그랬듯 서로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조엘은 '오케이'라며 쿨하게 인정해버린다.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이별은 가족과의 이별 다음으로 사랑했던 연인과의 이별일 것이다. 내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고 사랑하고, 공감했던 이의 빈자리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별하는 직후에는 분노와 배신감과 수치스러움으로 뒤범벅이 되어 다시는 열어보고 싶지 않은 상자가 되어버리지만, 그것도 사람의 기억인지라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숨기려 해도 좀처럼 숨겨지지 않는다.
이별 직후에는 그 기억을 덮어버리고자 갖가지의 발버둥을 치게 된다. 기억을 잊고자 술을 마시기도 하고, SNS를 차단하고 모든 흔적을 지워보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그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그 자리를 채워보기도 한다. 그러나 덮어보려 애를 쓸수록 덮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만 든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재밌는 상상은 '과연 정말 지울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까?라는 것이다. 영화 속 조엘처럼 지워지는 기억의 대상이 행복했던 기억까지 사라지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순순히 모든 기억이 지워지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조엘처럼 어떻게든 기억들을 끌어안고 절대 놓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기억은 내 삶에 몇 안 되는 행복한 기억이고, 이는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전 연인들에 대해 증오만 남았고 그래서 헤어진 것이라 단정 짓곤 하지만, 사실 그 증오라는 감정 이면에는 증오만큼의 애정 또한 남아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 중 하나는 아무리 기억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의 추억들은 조금씩 침식되어 간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결코 잊히지 않겠지만, 그녀와 누워 도란도란 나눴던 이야기들, 그녀와 걸어가며 장난치며 주고받던 농담들, 그녀의 공간에 있던 향기와 작은 소품들까지 그 작고 사소한 기억들은 하루하루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당장의 고통을 잊기 위해 그 기억들을 어떻게 묻어둬야 할지가 아니라, 이 사라지고 있는 추억들을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인지도 모른다. 떠나간 기억들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갈등을 겪고 있는 연인들에게 생각의 전환점을 던져준다. 그 어느 커플이든 안 맞고 맞춰가야 할 부분들이 수만 가지이기에, 다툴 때면 숨 막히게 느껴질 때가 많다. 때론 어떻게든 지지고 볶고 싸우며 맞춰가는 것보다는, 더 잘 맞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 떠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안 맞으면 안 맞는 대로, 맞으면 맞는 대로 그냥 '오케이'라며 쿨하게 인정하면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다르면 다른 대로, 비슷하면 비슷한대로 그냥 품어버리면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든 퍼즐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수 없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연인과의 이별부터 시작해서 이별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기억을 지우고자 하고, 남아있는 기억이라도 끌어안고자 하는 모습들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혹시 연인과 큰 갈등을 겪고 있다면, 아니면 이별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이 영화를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