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욘스 Oct 13. 2022

국토대장정 출발까지
2개월을 미뤘다.

욘스 국토대장정 이야기 02

욘스 국토대장정 이야기 01


1월 마지막 날, 퇴사를 했다.

그러니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몸도 한창 좋지 않았고 여행을 떠날 준비도 덜 되었다. 혼자 여행을, 그것도 도보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배낭도 없고 적합한 옷이나 신발도 없었다. 퇴사 후 좀만 쉬자 싶었는데 코로나가 꺾이기는 커녕 무더기로 터져 나왔다. 서울시 누적 확진자 수가 100명을 찍었다. 2020년 2월은 그런 날들이었다.


"아- 이번에도 국토는 글렀나..."


하지만 느끼고 있었다. 이번이 아니면 안된다. 이번에 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을 해보니 직장인이 시간을 내서 길게 여행을 갈 수 있는 때라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앞으로 내가 자율 휴가제 제도를 가진 회사에서 일을 한다 해도 한번에 15일 이상 휴가를 쓰는 건 분명 눈치 보이는 일일 터였다. 


이제까지 인생을 살면서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거나 아쉬워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회사를 다니면서 그간 여행을 다니지 않은 게 어찌나 아쉽던지. 고작 일주일 휴가 내는 게 왜 그리 눈치보이던지... 그리고 무엇보다 해마다 체력이 떨어지는걸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마음이나 먹을 수 있을지, 내 의지력으로는 가늠할 수 없었다.


퇴사 당시부터 준비물을 리스트업 했고 하나 둘씩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점차 '일'이 되어가며 귀찮다는 마음이 들고 있었고, 준비물은 아무리 챙겨도 부족한 것 같았다. '이건 필요할 거야'라고 구매 목록에 적었다가 다음날에는 '아닌가... 이건 그냥 짐인가' 하며 다시 지우는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금방 두 달이 지났다. 역시, 쉬는 시간은 너무나 빨리간다.


코로나 때문에 조금 일정을 미루면서 여자친구에게 4월에는 가겠다고 적당히 던져놨던 말이 있었다. 명확히 언제 가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확한 기일을 명시하지 않은 것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적당히 준비물을 챙기는 한적한 날들이 이어지던 3월의 마지막 날, ‘이렇게 4월이 오는구나~’ 하며 별 생각이 없던 나였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던져진 여자친구의 한 마디.


"내일 출발하는 거지?"


하하... 내일이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 말이 내 깊은 곳을 쑤욱하고 찔렀다.

나는 대체 언제 출발할 생각인 거지?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부끄럽지도 않아?


카페에 앉아 생각을 정리해봤다. 내가 왜 좀처럼 시작을 하지 못하는지, 뭐가 걱정되는지, 이 여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새로운 걸 도전해야만 발전도 있고 성취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게 나였다. 나는 완전하게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라 안정감이 무너지는 걸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수영장 앞에서 딱 한 걸음만 떼면 되는데 그 한 걸음을 떼지 못 하고 발걸음을 돌리곤 하는 사람.


그리고 아래는 그때 생각을 정리하며 적었던 글이다. 




굳어진 일상의 패턴을 깨부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비록 내가 어떤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려 한다 할지라도, '일상'을 유지하려는 나의 의지가 새로움에 도전하는 의지보다 약하다면 일상의 회전목마에서 내리기란 쉽지 않다. 

돈을 내고도 헬스장에 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인데, '하지 않아도 어떤 리스크가 없는 도전'이라면 더더욱 일상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스스로 무언가를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일상의 뺑뺑이(회전무대) 위에 올라타 그저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건 내 얘기다.


나는 이 지극히 평범하고 게으른 일상을 사랑해왔다. 

너무나 안정적이고 일상적이며 소소하고 포근하다.

흐르는 대로 삶을 살아왔고 여행을 목전에 둔 오늘까지도 그러하다. 

이 여행은 누구도 내게 강요한 적 없으며 책임을 지라 하지도 않는다.

회피한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돈을 내지도 않았으며 당장 내일 출발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루, 이틀쯤 미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일이 찾아오면, 다시 오늘 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내 일상은 이제껏 그래 왔듯이 푹신함에 돌돌 감긴 나른함처럼 내 곁에 머무를 것이다. 

그래, 그렇게 계속 둥글게 둥글게 돌아갈 것이다...


퇴사 후의 날들은 이제껏 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보상심리가 발동했던 탓인지 게으르고 나태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여행을 준비한다는 명목 하에 시간을 보냈고, '코로나 때문'이라는 적절한 이유로 발걸음을 주저했다. 그래, 타당한 이유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실은 스스로 걸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길 위에서 마주하게 될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나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 은근슬쩍 출발을 미루며 그렇게 일상을 빙글빙글 지키는 데에서 안도감을 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는 나의 '아무 일 없는 일상'을 보전하기 위한 이유 있는 방패가 되어.


하고 싶은 일들을 이루는 가장 단순하고 위대한 방법은 스스로 그걸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거나, 할 수 있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린 후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잽싸게 해치우는 것이다. 동시에 그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상황이 왔을 때 또는 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머리 위에 말줄임표나 물음표 따위를 띄우고 멍 때리고 있으면 뭐든 그냥 지나가는 법이다. 이 단순하고도 명쾌한, 그러나 언제까지나 바랄 뿐인 것과 하는 것의 차이는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결과의 차이로 돌아온다. 


물론 이것도,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온 내 얘기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나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한다.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깨끗하게 그만두고 다신 하고 싶다고 입에 담지 말자.

"나는 지금 하고 싶은가?"

그렇다. 이것은 나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힘들더라도 해내고 싶은 나의 일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상황인가?"

그렇다. 나는 퇴사 후 시간적 여유가 있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충분한 비용과 적당히 구비된 준비물을 가지고 있으며 문제없이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걷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거나, 상황이 좋지 않다거나 하는 등 내면에서 슬금슬금 기어올라오는 얘기는 무시하기로 한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아쉬운 대로 가고, 도중에 채울 수 있다면 채우면서 가면 된다. 문제가 있다 해서 그것에 기대 시작하지 못할 핑곗거리를 찾지 말고 피하면서 나아가려 최선을 다하자. 


이제 단조로이 돌던 회전무대 바깥쪽으로 나가 '슈퍼맨'을 해야 할 때다. 위험하고, 가장 불안정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가장 즐거운 도전의 순간. 이윽고 순식간에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바닥을 구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해야 하겠지만,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하늘을 날고 있었기에. 


미지에 대한 오늘의 걱정과 떨림 그리고 나의 선택을 믿고 이 불안정함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자.

고요한 기분이다. 





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할 수 있고 없고의 여부는 해봐야 아는 것이었지만, 적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국토대장정이 지금 내게 필요한 것 뿐만 내 인생에 있어서도 반드시 해봐야 하는 일-말하자면 버킷리스트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인생이 평생에 걸친 게임이라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메인 퀘스트는 이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이걸 하지 않으면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갈 수 없는데 이렇게 핑계만 대며 미적미적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준비물은 내가 생각한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필요한 정도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지, 내 몸뚱이를 길 위로 밀어넣기까지가 딱 절반만큼 힘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서울을 떠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10년 넘게 마음만 먹었던 국토대장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