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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욘스 Nov 07. 2022

걸어서 서울을 벗어났다.

욘스 국토대장정 이야기 03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

4월 1일 수요일 오후 1시, 사람.... 많음.

점심 시간대라 아주 많음.


서울 시내 주요 직장 밀집지역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종로 거리 한복판. 열심히 인생을 위해 일하고 있는 이들과 나란히 서서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는 요상한 복장에 큰 배낭을 메고 있는 한 남자. 평일 대낮, 북한산 자락도 아니고 종로 한복판에서 이런 복장이라니, 이 사람은 뭐지? 그들은 묘한 눈빛으로 나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병아리였다. 삐약삐약. 

국토대장정을 시작하는 첫걸음을 떼려는 병아리.


저는 오늘 국토대장정을 시작합니다. 해남 땅끝까지 갈 거예요.
날씨가 아주 좋네요. 오늘은 열심히 걸어서 성남시까지 갈 겁니다. 
그런데 걷다가 날 저물면 어떡하죠? 출발이 너무 늦었나요? 빨리 가야겠어요..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눈빛에 답해줬다. 사실은 그들 앞에 서 있기엔 행색이 조금 부끄러웠다. 최대한 빨리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혼자 하는 여행임에도 사진 찍을 여유 같은 건  없다며 호기롭게 삼각대를 들고 오지 않았던 나는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호다닥 셀카를 찍은 후 발을 굴리기 시작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다면, 또는 내가 남의 눈치를 덜 보는 사람이었더라면 더 멋진 인증샷을 찍고 출발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세종대왕님, 이순신 장군님, 용감하게 다녀올 테니 금방 다시 봐요.


최소 보름, 나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지막으로 한번 더 출발지를 눈에 넣고 걸음을 시작했다. 








4월 1일, 소월로에 벚꽃이 만발하던 날이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출발해 백범광장으로 올라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다른 길도 있는데 처음부터 오르막길로 안내해줬던 걸까 의구심이 들지만, 국토대장정 병아리였던 나는 '이쪽으로 가라니까 최적의 루트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카카오맵이 알려주는 루트를 쭐래쭐래 따라가기에 급했다. 팝콘처럼 붙어있는 꽃들을 보며 '남산만 해도 이렇게 예쁜데, 여행하면서 마주할 풍경들은 얼마나 예쁠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첫날의 목표 지점은 성남시 정자동에 있는 형의 집이었다. 광화문에서 출발해 서울을 빠져나와 첫날 당도하는 지점을 어디로 할까 고민해봤는데, 1번은 금천구 쪽으로 내려가 안양~군포 정도에 도착하는 루트, 2번은 과천 방향으로 내려가 마찬가지로 군포~의왕쯤에 도착하는, 그리고 3번은 청계산 자락을 지나 성남으로 가는 길, 마지막 4번은 잠실, 복정동을 지나 성남으로 빠지는 길이었다.


1번과 2번은 찜질방이나 모텔을 잡아서 잘까 싶었고 3번과 4번은 형네 집에 가서 자야겠다 생각을 해봤는데, 1번과 2번은 '숙소 잡아서 잘 바에야 그냥 1시간이면 집까지 가니 지하철 타고 집에 가서 자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쉬이 마음이 해이해질까 하여 3번, 4번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안전하게 도심을 지나 내려갈 것이냐, 갈 수 있는 길은 맞는 건가... 싶은 청계산 자락을 지나갈 것이냐 조금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카카오맵이 청계산 쪽으로 가는 게 더 빠르다며, 나를 인도했다. 지나온 길은 어디가 어디인지 아는 곳들이었다면, 이쪽은 초행길이었기에 조금 불안했지만 열심히 걸어가 보기로 했다. 앞으로는 전부 다 모르는 길들, 처음 가는 길들일 터였으니까. 일단 해지기 전에만 가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걸었다.


4월은 아직 해가 충분히 길어지지 않은 봄이었다. 일몰 6시 30분. 걷기 시작한 시간은 오후 1시. 걸어야 할 거리는 30km 정도. 지도상으로는 8시간이 걸린다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덜 걸릴 거라 생각했다(지도상의 도보 소요시간은 시속 4km 정도로 계산된다). 8시간 걸리면 9시 도착이니... 한참 어두워진 후에 도착한다는 말이기에 그렇게 만들면 안 되겠단 생각을 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몇 가지 나만의 기준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밤에는 걷지 않는다'였다. 어두워지면 치안도 그렇고, 다른 이들의 국토대장정 후기 등을 봤을 때 인도로만 걷는 것은 아니란 걸 알았기에 위험할 것 같았다. 더구나 산은 해가 더 빨리 지기 마련이기에 산자락을 지나다 해가 져버리면, 깨나 등골이 서늘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잠수교로 들어가는 터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날이 너무 더워서 땀이 줄줄 내리고 있었는데 땀을 시원하게 날려주었다. 아, 한강도 이제 한동안 안녕이겠구나.


걷는다는 것은 느리긴 해도 꾸준히 앞으로 나가는 방법이었다. 어느새 양재를 지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서초구 어린이 교통공원이었는데, 거주 밀집지역에서 조금만 벗어났을 뿐인데도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세 시간 남짓 쉬지 않고 걸어오다 보니 조금 지쳐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잠시 간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늘이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늘이 없어도 괜찮았을 만큼 해가 기울어 볕이 따뜻했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사람도 많이 없어서 적당히 쉬기 좋은 장소였다. 귀에 꽂고 왔던 에어팟도 배터리가 없었고 핸드폰도 마찬가지였기에, 충전할 겸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잠시 쉬면서 내 호흡에 대해 생각해봤다. 뭔가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는데, 걷는 동안 제대로 깊게 숨을 쉰 적이 없었나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가야 된다는 생각으로 걸어와서 그런지, 숨을 깊게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거나 하며 걷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빨리 가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조금 더 숨을 깊게 쉬면서 걷기로 했다. 난 내가 조급하게 걷기보다는 여행하듯 즐겁게 걷길 바랐다.


너무 오래 쉬면 몸이 퍼지기 때문에 적당히 쉬고 일어나기로 했다. 일어나며 신발을 갈아 신었다. 처음에 준비물을 챙기면서 어떤 신발을 가져가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국토대장정 후기를 읽어봤을 때 누구는 운동화가 좋다고 하고, 누구는 등산화가 좋다고 하는 등 의견이 분분했기에 많이 고민을 했다. 운동화도 구비해뒀지만 발목까지 잡아주고 밑창 탄탄한 워커(a.k.a. 전투화)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둘 다 가져왔던 것인데, 둘 다 장거리로 신어본 적이 없었기에 다 신어보고 둘 중 고르자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조금 더 걸어 경부고속도로 하부를 지났다. 매번 이 길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며 보는 풍경이거나, 신분당선으로 땅 밑을 지나기만 했는데 직접 그 옆을 걷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판교로 넘어갈 때마다 옆을 보면서 와 여긴 진짜 시골이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의외로 길이 잘되어 있고 걷기에도 좋은 길로 조성되어있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인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걷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버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사이에 압축되어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 대중교통이나 차를 타고 가면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며 지나가기 때문에 그렇게 몇 장면으로 압축된 공간에 실제로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멀찍이 떨어진 관찰자의 시점에서, 별다른 감상 없이 지나갈 뿐... 그 길을 걸어가는 일은 한 두 장면으로 압축된 공간을 쭉 펴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의 볼륨으로 보게 하는 일인 것 같았다. 걸어가는 잠깐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두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건 너무나도 적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2분이면 도착하는 역 간의 거리가 사실은 그렇게 가깝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압축하고,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해가 져 바람이 불고 꽤 쌀쌀한 날씨가 되었지만 이미 30킬로미터를 걸었더니 몸에서 열이 계속 올라 춥지 않았다. 반팔 티 하나와 바람막이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도 아직까지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생각보다 남은 거리가 길었다. 판교의 단지들을 지나며 다시 또 퇴근하는 직장인들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8시가 다 되어 있었다. 캄캄했다. 생각보다 많이 걸었고, 생각보다 지쳤다. 하지만 첫걸음을 잘 옮겼다는 사실이 너무 뿌듯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빨리 더 아래로 내려가 '어차피 지하철 타면 가까운데 집에 갈까...'따위의 안일한 생각은 버리고 앞만 보면서 나가고 싶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오던 와중 편의점 맥주 광고에 혹해 사들고 왔던 차가운 맥주와 함께 포장해온 볶음밥을 먹었다. 이 맛이지,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그렇게 첫 날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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