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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호 Jan 31. 2022

세계문화유산도시 취안저우


2021년 7월 25일 푸젠성 푸저우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대회에서 몇몇 세계유산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그 가운데 푸젠성 취안저우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진작에 소개하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미루다가 이제야 포스팅. 취안저우는 오래된 도시지만 잊힌 도시였는데, 그런데도 인구가 8백만이니 그야말로 중국의 위엄이다. 업계의 사람들에게는 동남아시아 푸젠계 화교화인의 주요 배출지로 유명하다. 이번에 세계문화유산 리스트에 추가된 것은 그것보다는 11-14세기에 걸친 취안저우의 황금기 때문이다. 도시 전체에 걸쳐 22곳의 유산들이 중국 송대 및 원대 해양무역의 대시장으로 이곳이 얼마나 번성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송대 해양 무역을 관장하던 관청 건물과 불교 사원 개원사, 무슬림 공동체의 존재를 가늠하게 해주는 청정사, 해양활동에 종사하던 현지 취안저우인들이 (지금도) 믿는 민간 해양여신인 마주를 모신 천후궁, 주희와 이탁오를 배출했을 정도로 남방유학의 중심이었던 이 지역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서원 등등.


 하여 선정된 도시의 주제도 “Quanzhou: Emporium of the World in Song-Yuan China”로 당시 취안저우는 말 그대로 세계의 대시장이었다. 당시 아랍세계에는 ‘Zayton’으로 불렸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도 원대 ‘자이톤’의 화려함이 묘사되어 있다. 알고 있기로는 이전에 몇 차례 시도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선정된 것은 주제가 너무 좋아서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이 선정이 반가웠던 것은 예전 박사과정 시절에 취안저우에 필드를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2주 정도 머물렀는데, 옛 도시 특유의 정취에 매료된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현지 박물관의 연구자분이 모은 컬렉션들을 마음껏 찍을 수 있어서 성과도 좋았다. 그 좋은 기분으로 다녀와서 취안저우에 대해 페북에 포스팅한 적이 있었는데, 찾아보니 벌써 6년 전이다. 이때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 싶어 새삼스럽다. 언급한 몇몇 장소와 역사적 사실들이 22곳의 선정 유산에 포함되어있는 것을 보니, 역시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기록용으로 그대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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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1


중국 남방 역사 문화의 정수- 취안저우(泉州)를 아시나요?


최근 시진핑 주석이 주도하고 중국 대외관계의 비전을 보여주는 정책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즉 해상과 육상 실크로드의 부활이다. 기존 태평양 대서양을 둘러싼 서구 해양 패권 중심에서 유라시아 대륙 패권 중심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중국의 비전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듣는 중요한 정책이다. 육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시안이라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은 복건성의 오래된 도시 취안저우이다. 우리에게는 장안이라는 옛 지명과 병마용으로 유명한 시안과는 달리 취안저우는 상대적으로 한국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나 역시 전공이 아니었다면 이 생소한 도시에 올 일도 공부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취안저우는 행정구역상으로 복건성의 한 도시지만 문화적으로는 민남(閩南)문화권의 중심 도시이다. 항구도시로서는 사실 샤먼(廈門)이 훨씬 더 유명하지만, 역사가 짧은 샤먼과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취안저우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복건성을 대표하는 지리적 특성은 대홍포 무이암차 등의 반발효차로 유명한 무이산과 푸저우(福州) 남부를 흐르는 민강(閩江)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민강유역에 사는 이들을 민인이라고 불렀고, 이로 인해 복건 지역을 그대로 '閩' 이라고 불렀다. 그 이남 지역을 민남이라고 하여 내륙과도 다르고 인접한 광동과도 역시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왔다. 민남문화의 특징은 비다와 인접한 해양성에 기반한 개방성과 유연성, 다양성에 있다. "海者, 閩人之田也."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구에 비해 경작지가 턱없이 부족한 복건지방의 지리적 특성상 바다로의 진출이야말로 민남인들의 삶과 정체성을 규정해 주는 중요한 생존방식이었다. 황하와 장강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문명의 대륙적 기질과는 다른 변방 및 주변부로서 민남지역은 그 특유의 해양무역을 통해 광동지방과 더불어 중국 남방 역사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민남 역사 문화의 중심축인 취안저우의 역사는 명청시기 해금(海禁) 및 아편전쟁으로 인해 그 중심이 샤먼으로 넘어가는 근세를 기준으로 대항으로서 역할을 했던 송원시기와 대표적인 화교 배출지역으로서의 근대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일찍이 무역항으로서의 취안저우에 주목한 것은 북송이었다. 1087년 시박사(市舶司)를 취안저우에 설치하면서 해외무역항으로서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남송시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항저우를 중심으로 한 남방으로 옮겨가면서 남방의 무역대항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남송 정부에게는 1127년 이후 취안저우로부터 거두어들이는 무역 수입, 세금이 국고의 주요 수입원이었을 만큼 주요한 항구였다. 그 이후 원대에  이르기까지 아랍, 아프리카, 동남아, 유럽 등지의 다양한 해외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외래문물과 문화의 창구이면서 국제무역항으로서 한때는 동방제일항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송원대를 거치면서 축적한 국제무역대항으로서 취안저우의 역량은 명대 정화의 대함대가 취안저우에서 그 항해를 시작함으로서 그 꽃을 피웠다. 그러나 영락제 사후 홍희제 선덕제를 거치면서 무리한 대외정책으로 소모된 국력을 회복하려는 통치방향이 채택되면서 취안저우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 해양 무역은 금지되었다. 동시에 대항으로서의 취안저우 역시 쇠퇴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국제 무역항으로서 취안저우의 문화적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유적들이 취안저우 시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지역은 불교가 대세인 지역이다. 당대에 지어진 개원사(開元寺)는 지금도 시내 한복판에서 취안저우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당송 시기 '泉南佛國' 이라고 불리었을 뿐 아니라, 송대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는 "此地古稱佛國, 滿街都是聖人" 이라고 했을 정도로 불심이 충만한 지역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이슬람 상인들이 일찍부터 방문하여 적극적으로 교역을 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이슬람 역사에 있어서도 취안저우는 빼놓을 수 없는 이슬람 성지중 하나이다. 특히 청정사(淸淨寺)는 북송(1009년) 시기 지어진 중국 대륙 현존 최고의 이슬람 사원이다. 동시에 중국 10대 명찰이자 대륙 내 회족들이 평생 한 번 가보기를 원하는 성지이기도 하다. 세계 유일의 석각 코란이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정화의 원래 이름이 마화(馬和)이고 회족이었다는 사실이 예사로 다가오지 않는다. 


흔히 민남 정신문화의 두 축을 불교와 유학라고 한다. 유학의 경우 주자학의 창시자 남송대의 주희와의 인연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출생이 민남 용계(龍溪)인데다 과거에 합격한 후 진사가 된 뒤 취안저우의 주부(主簿)로서 삼 년간 활동하였고(취안저우 시내에는 그 주부 건물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 무이산에서 서원을 열고 십년간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가 당시 취안저우의 풍경, 문화에 대해 칭송한 기록들이 곳곳에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영향으로 민남 지역 곳곳에 주희를 분향하는 서원들이 들어서 있고, 이들 서원에서 많은 진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취안저우의 경우 소산(小山)총죽서원(叢竹書院)에서 주희를 분향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민남인들을 주축으로 남방 신유학이 꽃을 피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취안저우 출신으로서 유학과 해양문화 속 다양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총아가 명대의 사상가인 이탁오(李卓吾)다. 불교의 영향이 큰 지역에서 중국인과 아라비아인의 혼혈인 아버지 아래 이슬람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유학자이지만 명대 기득권 세력이었던 유학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불태워버려야 할 책이라는 과격한 제목의 <분서> 등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러한 이유로 평생을 박해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결국에는 사상범으로 잡혀 압송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의 생가가 바로 취안저우 시내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취안저우는 알려지지 않은 남방의 주요한 역사 문화 중심 도시다. 많은 고대 및 근현대 유적지들이 여전히 보존되어 있고, 개발이 상대적으로 덜 된 탓에 과거의 거주지 및 생활 습속 등이 상당부분 잔존하고 있다. 거리를 거닐다 보면 마치 과거의 어느 시대를 체험하고 있는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근대사에 있어서도 주요 화교배출지로서, 중국남부 및 동남아시아 중화세계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주요 축으로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한 번 정리해 봐야겠다. 고대부터 근대에 걸친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취안저우를 규정하는 정체성의 핵심은 해양성에 기반한 그 특유의 개방성과 유연한 문화적 사고에 있다.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광저우, 샤먼 등의 국제적 근대 개항 도시들과는 또 다른 풍격을 가진 흥미로운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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