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월 23일, 영국령 말라야의 쿠알라룸푸르. 20대의 한 중국계 여성이 슬랑고르주 중국계 이주민들을 관리하는 식민관청인 슬랑고르 화민호정사(Chinese Protectorate 華民護政司) 앞에 서 있다. 단발머리에 하얀색 자켓, 신발, 스타킹, 검은색 스커트를 입은 이 여성은 갈색의 작은 서류가방을 들고 화민호정사 건물에 들어서서 당시 화민호정사 총독(Protector)이었던 다니엘 리처드(Daniel Richards)가 그의 비서와 함께 앉아있던 테이블 모서리에 서류가방을 두었다. 그리고는 다니엘 총독과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다가 만지작거리던 서류가방을 그에게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폭발. 다니엘 리처드 총독과 그의 비서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사망하지는 않았고, 폭발물을 던진 여성 역시 부상만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말레이시아 최초의 ‘정치적 테러 행위’로 평가받는 해당 사건은 ‘쿠알라룸푸르 폭발 사건’으로 불리면 큰 충격을 주었다.
이 ‘테러’를 행한 여성은 1901년생 26세의 웡쏘잉(Wong So Ying 黃素英)으로 중국계 아나키스트 조직의 일원으로 추정되었다. 그녀의 테러는 근본적으로는 당시 영국 식민정부의 중국계 이민자들에 대한 압박 – 특히 신이민자 그룹에 해당하는 중국계 노동자 및 농민들에 대한 강압적 조치와 탄압 - 에 저항하고자 하는 반제국주의적 무정부주의 운동으로 분류되지만, 보다 구체적, 개인적 동기로는 이러한 압박 속에 –아마 같은 무정부주의자로 추정되는- 그녀의 연인이 중국으로 추방되어 사망한 사건을 응징하려는 것이었다. 10년 형을 부여받은 그녀는 감옥에서 그 해에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해당 테러에 깜짝 놀란 영국 식민정부는 식민구역 내에 무정부주의자들이 심각하게 암약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다수의 무정부주의자들을 추방하기도 한다.
화민호정사를 타겟으로 삼은 이유는 당시 영국령 말라야 및 해협식민지의 중국계 이주민들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주요 관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877년 해협식민지에 설립된 화민호정사의 주요 목적은 신이민자의 관리,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중국계 비밀결사조직들에 대한 단속, 만연한 전염병 방역, 매춘업에 강제로 동원된 여성들의 구조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목적은 선했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다양한 중국계 이주민들의 삶의 방식에 간섭해야 했을 것이고, 때로는 그 수단이 강압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중국계 이주민 사회 내부의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좀 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20세기 초는 동남아시아 화교화인사에서 매우 흥미롭고도 중요한 시기인데, 19세기 중후반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중국계 이주민들로 인해 그들만의 정체성이 뚜렷해지면서 구체화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인한 공화국의 성립과 중화민족이라는 내셔널리즘 개념을 이식시키려는 쑨원의 노력이 빛을 발해 최소한 동남아시아의 주요 식민 도시지역에서는 중국계 신이민자들이 과거 현지인과 유럽인들에 의해 이중으로 차별받던 상황에 순응 및 적응하기보다 저항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1920년대 범중화세계를 강하게 강타한 반일제국주의 운동 및 국화운동 역시 중요한 계기였다.
그 주요 사상적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전체에 걸쳐 침투하기 시작한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였다. 물론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이 끼친 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1921년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창당되었고, 동남아시아 주요 도시구역에는 광둥성과 홍콩, 마카오를 통해 관련 사상이 서적 및 잡지를 통해 전파되었고, 때로는 지식인들이 직접 건너오기도 하였다. 화교화인사회 내부적으로 보면, 그게 내셔널리듬이든, 아나키즘이든, 꼬뮤니즘이든 중국계로서의 정체성을 근대 국가 개념에 기반하여 성립해가기 시작한 신이민자들과 2세대, 3세대 동안 현지에 뿌리내린 구이민자들 사이의 대립의 골이 깊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구이민자들 사이에서도 세대에 따라 식민체제에 잘 적응하여 성공한 아버지 세대와 서구식 교육을 받아 국민국가 개념을 토대로 이민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재인식하기 시작한 자식 세대 사이에 갈등이 드러나기도 한다.
26세 웡소잉의 테러는 1910년대 후반, 1920년대 남중국해에 걸친 사상적 전환과 이민사회의 구조 및 성격 변화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고, 더이상 중국계 이주민들이 식민체제에 대해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시작점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50-60년대 자치권의 획득과 함께 정권을 잡는 싱가포르의 리콴유 역시 내부 사상 다툼에 애를 먹었고, 무리하게 처리하다가 두고두고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