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종혁 Dec 13. 2018

내가 너에게 닿을 수 있을까

문제: A는 B에게 닿을 수 있을까?

B의 경우


B와 나는 닮은 점이 많았다. 9살. 2학년 2반과 금호아파트. 둘 다 그때쯤 쓰기 시작한 커다란 뿔테 안경. 그리고 서로 아닌 친구가 없었다는 점까지도.


체육시간에는 축구를 해야만 다른 남자애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축구를 못했다. 그래서 안했다. 반에서 체육시간에 축구를 하지 않는 남자애는 우리 둘이 전부였다. 먼지가 날리는 운동장 밖, 늙은 소나무 밑에서 우리 둘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축구를 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책을 읽고 싶은데 아이들 눈치가 보인다고.


하루도 조용한 적이 없었던 초등학교 2학년 교실. 그 때 또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주목을 끌기 위해 온갖 왁자지껄한 장난을 치는 친구들. 그 사에서 우리는 그들의 기믹을 비판하며 웃기게도 요즘 얘들은 점잖지 못하다고 말했다. 우리에게서 그들을 열심히 분리해내며, 우리는 우리가 만든 세계에서 조용히, 하지만 확실히 친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덕분에 반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보통의 세계”를 무시할 수 있었다. 축구도, 웃기는 장난도, 반에 가져만 오면 아이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숱한 물건들도 무시할 수 있었다. 그 해 겨울에 우리는 아파트 단지에서 서로를 닮은 눈사람을 만들며 킬킬댔더랬다. 행복을 자축하듯이. 축구를 하고 힐리스를 신고 BB탄 총을 쏘는 그들을 비웃듯이.


커지던, 커지기만하던 우리의 세계. 짐작조차 못했다. 겨울이 끝나면, 세삼스럽게도 이 세계가 끝난다는 것을. 개학날, 학교에서 만난 B를 보고 신나게 달려가 말을 걸었을 때, 내 눈길을 끈 것은 그의 머리 뒤편에 나 있는 구멍이었다. 

머리카락이 없었다. 원형탈모처럼. 그때의 기분을 잘 기억해내지는 못한다. 개학날 일주일 전까지 너랑 매일 통화를 했었던 게 바로 난데, 내가 아는 모습이 아닌 너를 보는 당혹스러움. 무언가 엄청난 일이 있었지만 짐작이 털끝만큼도 되지 않는 아득한 느낌. 궁금함. 대체 왜 그렇게 됐을까.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세계에 가득했던 B의 일정한 모습들이 그를 이해해보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 보는 방식으로 달라져 있는 그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다가가지는 못한 채로, 주변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내 맘대로 그를 이해하려 했다. 어떤 아이는 B가 자기 스스로 머리를 뽑았다더라. 그 말을 듣고서 나는 학교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가능한 새게 잡아당겼다. 엄청나게 아팠지만 뽑히지는 않는 걸 보니 이러지는 않았겠다 싶었다. 그런게 다였다.


서로간의 침묵은 봄방학을 넘어 계속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B를 찾지 않는 것이 처음이었다. 3학년 새 학기가 시작하는 개학날에 B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전학을 갔다고. 작별인사는 없었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건넬 기회를 놓쳤다. 아마 평생. 앞으로 아주 커서 어른이 되어도 B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를 것이라 직감했다. 부풀어 올랐던 우리의 세계는 B의 머리에 생긴 500원 동전만한 구멍으로 인해 폭삭 주저앉았다. 소중한 것들은 참 빠르고 야속하게도 그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버렸다.   


A의 경우


 스무 살이나 먹고 나서야 나는, 이 경험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 대학에 붙어 서울로 이사하려고 집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옷장 잡동사니 상자에서 9살 생일날 그가 줬던 탑블레이드 팽이와 편지가 나와서. 왜 나는 B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말도 건네지 못했을까. 어떻게 영영 잃어버린 것일까. B를 찾을 수는 없을까. 잊고 있었다는 죄책감이 들어 머리는 미뤄왔던 생각들로 복잡해졌다. 그 와중에, 이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내식대로 세상이 돌아가야만 직성이 풀렸던 유년기는 끝났으니까. B를 느꼈던 그때보다 훨씬 컸고 다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테니까. 이제 더 이상의 이런 상실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난 오만했다. B는 내가 경험할 수많은 상실의 시작이었다. 끝이 아니라. 


그랬다.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말을 건네지 못하고 종국엔 그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숱하게 더 많았다. 9살이든 20살이든 상관없었다. 다 큰 나는 택시기사가 무서워 택시를 타지 못하겠다는 친구 앞에서 운전이 유난히 험하고 나에게 욕지거리를 뱉었던 택시기사와 싸웠던 무용담을 펼쳤다. 마음의 병을 겪으며 힘들게 삶을 유지하는 동료에게 힘든 건 알겠는데 일이나 하라고 면박을 줬다. 사과를 하기 전에 그 친구들은 모두 나를 떠났다. 그 말들이 결국 그들에겐 내 모든 모습일 것이다. 너무 부끄럽지만 솔직히 타인의 고통이 귀찮을 때도 있었다. 특히 내가 힘들 땐, 그럴 때 내가 뱉은 위로의 팔 할쯤은 공허했고, 따뜻해보여도 차가운 말이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서야 이 모든 것들이 후회로 밀려왔다. 나는 그들에게 미안해 부대꼈다. 내가 누구를 잘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나는 언제나 네가 될 수 없었다. 네가 느끼는 고통이 나에게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그 감정이란 늘 다르고 항상 다른 고통이었다. 아니, 애초에 고통에 종류 따위는 없었다. 정확히 같은 곳에서 비슷하게 넘어져도 어떤 사람은 아픔을 더 크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부끄러움을 더 크게 느꼈다. 어떤 사람은 그 고통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로 일반적이지 않은 다른 느낌의 고통을 느꼈다. 진심으로, 옆에 있어주고 싶을 때도 나는 너에게 닿지 못했다. 가끔은 네가 겪었던 방식과 정확히 똑같은 감정이 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를 이해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워서. 나는 잘 못하는 것 같아서.   


A, B 의 경우


비단 나뿐일까. 우리 모두는 어떤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다. 우리는 타인을 완벽히 알 수 없다. 아주 간단하게도 이유는, 나는 네가 못 돼서. 세상엔 상처받은 수많은 B와, 그렇지 않은 A가 무수히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물놀이 행사를 기획했던 단체가 있었다. 바다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수상 레저라니. 그것도 유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유가족들은 이에 반발했고, 또 다른 상처를 받게 되었다. 단체는 “아픈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며 철회했다. 그들이 “헤아리지 못했다는” 지점은 원망스럽다. 이미 엄청난 상처를 떠안은 유가족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혔으니. 그러나 행사가 기획되고 홍보되는 과정은 원망스럽게도 자연스럽다. 단체는 유가족들이 느끼는 것만큼의 고통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물”과 관련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의 기준대로 유가족들을 이해하려 했다. 결과는 또 다른 상처였다.


이게 디폴트다. A가 그들의 자리에서 B의 고통을 관망만 한다면 당연히 생기는 일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하면. B를 향해 한 발짝 내딛지 않으면. 앞에서 너무나 많이 이야기했듯 죽어라 애를 써도 타인을 이해하는 건 힘들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의 자리에서 고통을 관망만 한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다른 A들은 한 발짝 내딛고 있는가. 타인이라서 생기는 이해의 불가능을 넘으려 하는가. 이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있는가. 아니다. 어떤 A들은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것 같다. 아무리 골머리 쓰고 앉아도 결론이 안 나는 일인데, 포기하면 편하니까. 그들은 누군가의 상처를 외면한다. 성폭력 피해를 공개적으로 호소하는 누군가에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콩밥 먹을 각오하라고 협박한다. 사람들의 인식변화를 촉구하는 성소주자에게 일단 얘네가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존재부터가 극혐이라고 말한다.


“프로불편러”라는 단어는 그들의 창이자 방패다. 상처를 이야기하는 B들에게 그것 가지고 불편해하냐며 공격한다. 우리 A가, 다수가 너희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줄 필요가 있냐고. 그렇지 않아도 세상은 잘만 돌아갈 거고 그것은 바뀌지 않을 거라며 B들에게 무기한적인 공포를 선사한다. 동시에 본인은 이 세상에서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며 방어한다. 그들은 이미 눈과 귀를 막아버렸다. 


포기하면 불편하다

당신을 이해하는 것. 미친 듯이 어려웠다. 내가 감히 그럴 수 있을까도 싶었다. 하지만 누구처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포기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로 남았으면 좋겠어서. 당신도 나의 고통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남들의 상처와 고통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려는 삶에 ‘우리’란 없다. 그런 삶이 살아가는 세상엔 사람이 단 한명이다. 상처와 고통이 없는 낙원에 살고 있는 오지는 정상인 ‘나’, 그뿐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완벽할 수 있는지? 어떤 누군가라도 과연 그렇게 엄청난 정상성의 오로라 안에 있을 수 있는가? 그래서 당신에게는 하루아침에 자식을 죄다 잃는 사고가 일어날 수 없는가? 당신이 당신의 존재를 정의하는 방식이 위험에 빠지는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는가? 


아닐 것이다. 전지전능함이 없는 우리는 모두 고통과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상처들을 끊임없이 이해하려 하고 다가갈 때,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구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포기하지 않으며 촘촘한 안전망을 만들어 낼 때, 우린 더 많은 서로를 구해줄 수 있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누군가는 계속 포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처를 내 앞에서 치워버리는 행위는 구할 수도 있는 사람을 자꾸만 나락을 빠지게 할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웃어라. 세상도 같이 웃어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분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고통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조금은, 같이 울어줄 순 없을까. 웃는 것도 되는데, 우는 것도 당연히 되자 않을까. 우리가 조금 더 우리일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 한켠을 채우고 있을 동안에는 난 포기할 수가 없다. 



글을 쓰며 B를 내 안에 다시 되살려냈다. 아주 가물가물하지만 얼굴과 습관, 그리고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던 머리 위 구멍까지. 마음이 아팠다. 아마 평생 알 수도 없겠지. 난 왜 그때 너에게 닿지 못했을까. 넌 내가 필요했었던 건 아닐까. 그것 역시 이제는 알 수도 없겠지. 그때 너에게 좀 더 다가갔다면, 우리의 세계를 지키려 했다면. 


B를 보내고 나서도, 난 또 다른 B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해 어떤 사람들을 또 내 곁에서 떠나보내야만 했다. 왜 그랬는지, 왜 그렇게 아팠는지, 듣지 못하는 이야기가 많아져갔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노오력에 그칠지라도 그들에게 발자국 한 번 더. 


모든 이해가 이 긴 글처럼. 문제가 나오고 단답이든 서술이든 답을 맞히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답은 맨날 바뀌어만 가고 문제는 무수하겠지. 그것들에 둘러쌓이는 매 순간마다 포기하지 않고 내가. 당신에게.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행복할수가 없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