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가까이 써 온 플라스틱 소품 서랍이 있다. 증명사진이나 도장처럼 중요한데 자주 쓰지는 않아서 까먹게 되는 것들을 주로 담아 두었는데, 거의 3년쯤 전에 새로운 물건이 하나 더 들어왔다. 레이블의 상태만 보아도 꽤 오래 묵은 것으로 보이는 카세트테이프이다. 레이블에는 '녹음, 20개월'이라고 쓰여 있다.
아주 예전에 엄마가 "엄마랑 아빠가 너 애기때 목소리를 녹음해 놓은 테이프가 있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라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종종 테이프를 못 찾겠다며 아쉬워했는데 이삿짐을 챙기며 엄마의 옛날 물건을 모아둔 상자를 열어보니 저 테이프가 등장한 것이다. 20개월은 내 나이이다. 아직 두 돌이 되기 전, 1986년 연말이나 87년 초 어느 날이겠지.
휴대용 카세트가 고장나버렸기 때문에 문제의 테이프를 재생해 볼 수가 없었는데, 올봄에 문을 연 기록매체 박물관에 아날로그 매체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장비가 있어서 신세를 좀 졌다, 정말 다행히도 상한 곳이 없었던지라 무사히 CD로 만들어 올 수 있었다. 물론 변환하는 동안 장비 앞에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앉아 30년 전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내가 옹알이하는 소리 (엄마를 부르려고 한다거나 이게 뭐야? 같은 소리)가 신기했고, 엄마의 젊은 시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지금 나의 목소리와 비슷해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진짜 놀라운 것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A, B 면을 꽉 채워 녹음했지만 사실 내 목소리는 다 합쳐도 20분이 안 되었다. 내 옹알이가 끝난 뒤에 바로 흘러간 옛 노래가 나와서 웃음이 터졌다. 정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노래였는데 이상하게도 좋았다. 대체 뭘까? 하고 계속 귀를 기울였다. 김동건 씨의 익숙한 음성이, 하지만 내가 아는 소리보다 훨씬 젊은 음성이 들렸다. 엄마와 아빠는 가요무대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노래 몇 곡이 지나가니 아는 곡이 나왔다. 현미의 노래 '밤안개'였다. 그때 불현듯 깨달음이 왔다. 재즈를 처음 들을 때 느꼈던 이상한 익숙함의 근원, 그것은 가요무대였다. 그날 알게 된 사실인데 밤안개는 번안곡이고 원래는 냇 킹 콜이 부른 노래였다고 한다. 색소폰 연주자이자 이 곡을 편곡한 이봉조는 원래의 레코딩에 멋진 색소폰 솔로 파트를 넣었다. 옛날 우리 가요에는 온갖 음악들이 다 섞여 있었고 재즈도 그 안에 양념처럼 숨어있었는데 난 그것도 생각 못하고, 아 뭐지? 재즈가 왜 이렇게 익숙하지? 라며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농담처럼 "저는 가요무대로 재즈에 입문했습니다 와 엄마 아빠가 조기교육을 어마어마하게 시켰네요."라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내 음악 취향에 아주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엄마가 틀어둔 라디오이다. 엄마는 가게에 하루 종일 라디오를 틀어 두었고, 나는 방에 엎드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다가 좋은 노래가 나오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바로 몇 년 전까지도 라디오를 자주 들었는데, 잘 모르던 옛날 노래를 많이 알았다. 가령 이연실의 노래 '목로주점'이나 '소낙비' 같은 곡들은 '최백호의 낭만시대' 를 엄마랑 같이 듣다가 알게 되었다. '소낙비'는 밥 딜런의 곡을 번안한 곡인데, 실은 대학생 시절에 한국 현대사 전공수업에서 양병집이 밥 딜런의 곡을 번안했으며 그 곡을 김광석이 다시 부른 것을 알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소낙비' 도 양병집이 번안해 녹음한 적이 있고 이연실도 그 곡을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포크 음악을 좋아했고 전형적인 성인가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흔히 '청년문화' 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노래들을 많이 들었다. 난 항상 엄마의 예쁜 취향에 감탄하곤 한다.
그런데 이 가요무대 사태(?)를 겪고 보니 아빠도 꽤 좋은 음악 취향을 가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커졌다. 사실 원래도 아빠의 이상한 취미들에 대해서 삼촌과 고모들에게 많이 듣긴 했고, 나는 아빠를 닮은 탓에 돈 안 되는 여러 잡다한 일에 관심이 많은 게 아닐까 늘 의심하긴 했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아빠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내가 커 가는 동안 어른들은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사실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컸다. 그저 술을 안 마시고도 흥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만 종종 들었을 뿐이다.
그나마 스무살이 넘어 단편적으로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동생에게는 돈 없다고 버스비도 안 주더니' '예쁜 여자랑 영화를 보러 가더라', '동네 사람들 불러놓고 집에 있는 판 틀고 수건 뒤집어쓰고 잘 놀았다' 라거나, '너희 아빠는 만화책 엄청 좋아했다'며 삼촌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동네에 예쁜 여자는 다 만나고 다녔다는 형님의 존재에 대해서 억울하다는 듯 회고했다. 실제로 할머니 댁에는 아빠와 큰아빠가 열심히 모았던 LP판들이 있었다. 큰집 남매들이 어릴 때 다 못으로 긁어버린 바람에 제대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그 판들과 전축을 보물처럼 간직했다. 엄마가 나중에 집에 몇 장 가져온 걸 보니 별 특이한 건 없었고 이런저런 컴필레이션 판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아빠가 계셨으면 나랑 노상 덕질 하다 엄마한테 등짝이나 맞았겠구나, 하고 실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꽤 오랫동안 친가든 외가든 나와 같은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무척 외로워했었다. 외동딸이기에 형제자매가 없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냥 나는 내 취향을 나눌 사람이 가까이에 있었으면 - 했고, 아쉽게도 그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나와 같은 사람' 이 아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기분이 좋았다. 뭐 이것도 다 그 사람이 없으니 하는 지레짐작이지만서도.
뒤늦게 이런저런 기억들을 헤집어 보니 엄마도 아빠도 꽤 멋진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구나 싶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예쁜 밥그릇을 쓰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듣는 것. 박물관에도 미술관에도 아름다운 것을 만나러 가 보는 것.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품위를 지키는 것. 이것이 엄마가 나에게 가르친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그럭저럭 쓸만한 어른이 된 것 같다. 나의 부모님은 신기하게도 각자 집안의 여섯째로 태어나, 어려웠던 형편 탓에 공부도 제대로 못 하고 떠밀리듯이 타향으로 떠나 일을 하다가 만났다. 고향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같은 동네는 아니지만 그저 경북에서 온 사람들이었다는 이유로 가까워지고 부부가 되었고 나를 낳았다. 그리고 그런 고단한 삶 속에서도 각자의 좋은 취향을 간직했다.
이것은 아주 옛날, 아기가 잠을 안 자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젊은 부부가 보던 방송이 하필이면 가요무대였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배움이 모자라도 형편이 어려워도,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것, 더 좋은 것을 향해 가려는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나에게 그걸 가르쳐준 것은 엄마와 아빠이다. 아빠가 무엇을 좋아했는지야 알 길이 없지만, 엄마는 김정호의 '하얀 나비'를 참 좋아했다. 난 엄마의 이런 섬세한 취향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