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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불 Nov 24. 2020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견디는 법

감염병의 시대를 환자와 환자 가족으로 살아가기

나는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은 아니고, 실은 공부 자체에 대단히 열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좌우간 역사가 좋았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사학과에 가서 졸업까지 했다. 연대표에 밝지도 않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빠삭한 것도 아니지만, 내가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는 바로 지금처럼 역사책에 길이 남을 시간을 직접 내가 살아간다는 것을 체감할 때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내가 역사의 한 복판을 걸어가는구나' 하는 희열과 경이가 아니라, 역사책에 남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중 극히 일부일 뿐이구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작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이래 나는 총 두 번의 감염병 유행을 겪었다. 첫 번째는 서울의 대형병원조차 원내감염을 피해 갈 수 없었던 메르스이다. 그때만 해도 병원 출입도 자유로웠고 사람들이 요즘처럼 감염병의 두려움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같은 병실을 쓰던 환자 가족들이 위생관념이 전혀 없고 아무 손님이나 마구 불러대서 주변인들에게 스트레스를 호소했던 기억도 난다. 마스크 가격이 오르긴 했지만 올해처럼 마스크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이진 않았다. 새니타이저를 구하는 건 물론 어려웠지만. 환자가 있으니 조심한다고는 했어도 그때는 심각한 걸 잘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올해의 감염병 유행은 예전과는 다르다. 2020년의 COVID-19 판데믹을 온몸으로 겪으며 나는 역사책 속에서 건조하게 기록되었던 수많은 감염병 유행의 기록이, 말 그대로 텍스트로 존재하기에 거리감을 느끼며 과거의 일로 묻어둘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으며 연말을 앞둔 지금까지 모두가 질병과 그로 인해 파생된 여러 문제와 싸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먼 미래에 신종 감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2020년이라는 기록 뒤에서 드러나지 않을 작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두 번 의 큰 수술 뒤에 요양병원에서 재활치료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입원한 지가 한참 되어서 재활치료의 종류와 횟수도 줄어든 상태이지만 집에서 엄마를 모시기엔 내 사정도 엄마의 몸 상태도 여의치 않아 병원에 계속 입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매주 주말마다 병원에 찾아가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간단한 운동 정도를 도와주고, 간식을 챙겨주고 일요일에 목욕을 시켜주는 게 주말 루틴이었는데, 올해 설 연휴를 기점으로 우리 지역에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하며  병원의 면회가 중단되었다. 우리 지역의 환자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요양시설 등에서 환자가 급증했고 처음에는 며칠 지나면 면회가 될 거라고 하던 병원에서는 사태가 진정되면 가능할 텐데 언제나 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엄마는 처음에 얼굴도 못 보고 가냐며 서운해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적응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달 여 뒤에 나는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엄마의 건강에 또 다시 문제가 생긴 뒤였다.


뭐 여러 가지 할 말이 많지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엄마는 그 사이에 병이 심각해진 건지 그 전조를 내가 예측하지 못했는지는 잘 몰라도 꼬박 한 달을 몸이 아파 잠을 제대로 못 잔 상황이었고, 몇 가지 검사를 해보려다 여의치 않아 대학병원에 갔고 암 진단을 받았다. 난소암 4기로 추정되며 환자의 몸 상태 때문에 정확히 검사를 할 수는 없었지만 복강 내에 상당히 전이가 된 상태라고 했다. 엄마의 몸은 퉁퉁 부었고 통증 때문에 자리에 제대로 누워있질 못하고 그래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온 집안 식구들은 엄마가 당장 죽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해했고 나는 그저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버텨갔던 것 같다.


메르스를 한 번 겪은 대학병원은 출입이 더욱 까다로워졌다. 면회는 전면 금지, 보호자는 상주 보호자 딱 한 명만, 병실에서는 무조건 마스크를 쓰고 커튼을 치고 생활해야 한다. 출입증을 가진 보호자만이 병동에 갈 수 있고 그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비집고 들어오려는 사람들 때문에 병동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종종 고성이 오고 갔다. 나름의 장점도 있었다. 면회가 전면 금지되니 다른 환자들의 손님도 없고 특히나 일요일만 되면 찾아오는 종교인들이 없으니 조용해서 좋았다. 하지만 어쨌든 항암치료가 끝나면 요양병원으로 돌아가야 했고 요양병원에 가면 다시 엄마를 볼 수 없으니 확실히 불편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엄마는 아프고 난 뒤에 나에게 많이 의지하는데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받은 의무기록을 보면 딸에게 의지한다고 쓰여 있을 정도이다) 두 달 동안 서로 못 만나며 악화된 건강상태에 대해서 걱정을 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암치료를 어쨌든 견뎌냈다.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자면, 약속된 항암치료를 끝내고 추가 항암치료를 하고 추적관찰을 하기로 결정한 상태이다. 수술은 여러 가지 리스크 때문에 진행하지 않기로 했고, 종양은 줄어들고 전이된 부분도 어느 정도 깨끗해졌지만 완벽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내년 초에 다시 한번 검사를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처음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지만, 발병 전을 생각하면 그때보다는 확실히 안 좋아졌기 때문에 해피엔딩은 아니다. 뭐 그래도, 앞으로 더 유예기간을 벌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병이 깨끗하게 낫고 정상으로 돌아가는 해피 엔딩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처럼 남은 인생 동안 병과 계속 공존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삶은 그저 찝찝한 열린 결말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는 일이라는 게, 뭐 보통 그렇긴 하다. 앞으로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노력하고, 그러면서 남아 있는 시간을 더 보람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리고 엄마에게 남은 시간은 이전에 남은 시간보다 더 줄어들었겠지만, 앞날은 알 수 없고 그저 남은 시간을 최선을 다 하는 수밖에 없다. 그냥 그게 지금 나와 엄마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병은 의사가 치료하고 치료가 어렵다면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도울 수 있지만, 사람이 온전히 그걸 다스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병이 무섭다. 엄마의 몸에 하나씩 둘씩 생겨난 병을 생각하며, 또 주변의 아픈 사람들을 생각하며, 또 이 감염병의 시대를 살아가며 다시 한번 느낀다. 우리는 그저 이 병을 마주하며, 병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또 병과 싸울 기회를 도모하며 살아간다. 엄마는 다시 요양병원에 있고,  매일같이 나에게 전화를 하며 간병인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거나 병원비를 걱정하거나 앞날을 걱정한다. 한편으로는 내가 밥은 먹고 있는지 집에는 갔는지 엄마가 아끼는 놋그릇은 잘 있는지 그런 것들을 궁금해한다. 나는 한 달 넘게 엄마 얼굴을 못 보며, 내가 출퇴근길에 혹은 회사에서 다른 병에 걸리지 않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문제가 안 생기기만을 바라며 지낸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고 그다음은 그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더욱 좋아지기를 바란다. 병과 공존하며 또 다른 병을 걱정하며 사는 것, 그것이 환자와 환자 가족이 코로나 시대를 견디는 방법이다. 아, 하지만 한 사람이 버티기엔 너무나 많은 걱정이 아닌지. 그러니 빨리 이 상황이 좋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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