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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불 Apr 20. 2018

God bless the child

세종문화회관 일대에 얽힌 추억들을 다 이야기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감이 잘 안 잡힌다. 팻 메시니의 공연을 처음 본 것도 세종문화회관이고, 서울시향의 '합창' 공연을 처음으로 본 것도 세종문화회관이다. 대학교에 다니던 내내 주말에는 세종문화회관 뒤편 내수동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길 건너의 교보문고는 나의 아지트였다. 그리고 키스 자렛의 공연 세 번을 모두 본 곳도 바로 세종문화회관이었다.


2010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모 공공기관의 냉방도 안 되는 작은 지하 사무실에서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보안 때문에 모든 컴퓨터에 인터넷 연결이 안 되어 있었고, 나는 스마트폰을 쓰지도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소문으로만 듣던 키스 자렛 트리오의 내한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인터넷도 안 되는 곳에서 어쩌지? 하고 고민했는데, 마침 예매 당일에 인터넷 연결이 필요한 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늘이 주신 기회였는지 나는 내 예산 안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를 얻었다. 비록 세종문화회관 1층의 가장 구석진 자리였지만 뭐 어떤가. 맨 앞줄이었고. 키스 자렛을 볼 수 있는데.


키스 자렛의 악명(?)이야 이미 이름 높고 하필이면 2007년의 움브리아 재즈 페스티벌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였다. 객석의 소음, 촬영하는 소리, 카메라 플래시 등등 몰입을 방해하는 대부분의 요소에 민감한 것으로 유명한 키스 자렛은, 객석에서 빨간 불이 보였다는 이유로 무대에 올라오자마자 관객들에게 욕설 섞인 불평을 했고 그로 인해 구설에 올랐다. 재즈 팬들은 대체로 키스 자렛의 깐깐한 성미와 기행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울 공연을 앞두고도 공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쨌든 공연 당일이 되었고 놀랍게도 전 좌석이 다 판매된 가운데 공연장은 기대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길게는 수십 년을 기다려온 팬들의 마음과 눈길은 무대 위에 모였다. 인터미션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셋, 아름다운 스탠더드 넘버, 그리고 정말이지 거장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세 사람의 연주가 흘러갔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는 놀라운 멜로디가, 드러머의 스틱과 손이 닿는 곳곳마다 빛나는 울림이, 베이시스트의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중심이, 무대 위에 빛나는 삼각형을 그렸다. 내 생각보다 세 사람의 악기 배치는 무척 가까웠고, 연주 중간중간 그들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신뢰와 사랑, 키스 자렛 트리오의 진짜 가치였다. 키스 자렛의 악명 높은 일화들 때문에 의심했던 일들, 이제 예전 같지 않다더라 하는 말들은 다 잊혔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노쇠한 몸으로도 아름다운 앙상블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거장의 진면목이었던 것이다. 


공연 당일까지 정말 듣고 싶다- 이것만 들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던 곡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God bless the child 였다. 사실 당시엔 키스 자렛의 앨범을 그렇게 열심히 들었던 것도 아니고, 스탠더드를 많이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God bless the child는 내가 비로소 키스 자렛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던 곡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 곡을 들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본 공연이 끝나고,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퇴장했던 세 사람이 무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재즈, 가스펠, 락앤롤, 블루스,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는 곡, 빌리 할러데이의 마음과 목소리가 담긴 곡, 아마 공연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았을 -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간절히 기대했을 키스 자렛의 가장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연주.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그 트리오가 연주하는 God bless the child 였다. 아마도 나는 이 연주를 듣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것 같아! 지나간 좌절과 피로와 고단했던 삶에 용기를 주러 그들이 온 것은 아닐까? 온갖 질문과 해답과 기쁨과 슬픔이 지나갔다. 전성기에 비하면 다소 못하다는 연주라는 평도 있었지만 난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 순간 하나만으로도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다. 그 뒤로도 키스 자렛의 공연을 두 번이나 더 봤고 또 다른 좋은 공연도 많이 봤지만 - 정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따로 있음에도 그 날 그때는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영원히 남을 것만 같다. 아마도 신이 있다면 그날 그 자리에 깃들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음에도, 가끔은 그렇게 불가사의한 일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끌어다 쓰고 싶기도 하니까. 곡 제목도 그럴싸하지 않나. God bless the 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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