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생의 비밀
켈리그라피를 하는 지인이 둘째 출산 선물로 원하는 문구를 써주겠다고 했다.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면 좋겠다 싶어서 '꽃길만 걸어라' '엄마에게 와줘서 고마워' '사랑' '행복'...
몇 가지 단어와 문장을 곱씹다가 문득 아이가 아닌 내가 두고두고 보며 새길 수 있는 글귀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요청한 문장은 바로 'Stay in the moment'
직역하면 '순간에 머물러라' 정도 되겠다.
몇 년 전, TV에서 우연히 본 불교 다큐멘터리에서 저 말을 처음 들었다.
영국에서 온 백인 스님이 명상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말이 바로 'stay in the moment'였는데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내가 있는 이 순간에 머물러 있으라는 이야기였다.
쉬운 예로 지금 밥을 먹는다면, 꼭꼭 씹히는 밥알의 느낌과 밥의 담백한 맛과 밥에서 나는 냄새에 집중하라는 거다. 밥을 먹는 그 단순한 행위와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머릿속으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가?
"자, 허리 반듯이 세우시고 표정은 편안하게, 잠시 생각을 내려놓고 호흡에만 집중하세요."
요가할 때 항상 처음과 끝은 명상이다. 요가 선생님은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했건만, 명상하는 그 짧은 1~2분의 시간조차 내 머릿속엔 온갖 잡생각들이 먼지처럼 둥둥 떠다녔다.
아까 요가 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던 것 같은데 누구 전화였을까? 급한 메시지면 어떡하지?
오늘 관리비 내는 마지막 날 아닌가? 얼른 집에 가서 확인해봐야지. 이따 점심은 뭐 먹지? 등등...
그 순간 나는 요가 시간에 머무르지 않았다.
큰 아이를 키울 때도 나는 육아에 머무르지 않았다.
아들 녀석을 보면서도 보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고나 할까?
눈은 아이를 보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딴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희운이를 볼 때, 희운이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하고 경이와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희운이의 눈과 코와 입, 발그레한 볼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아,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우리 아기. 내가 이런 아이를 낳았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야.'
이런 감정을 느껴봄 직도 하건만... 머릿속으로는 대출이자 낼 걱정하고 있고 마감해야 하는 일을 생각하고
어제 봤던 TV 드라마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아이를 제대로 보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매 순간 하등 쓸데없는 생각들에 사로잡혀서 아이를 키우면서 얻을 수 있는 소소하지만 빛나는 행복감, 기쁨, 보람 같은 느낌을 다 놓쳐버린 것 같다.
Stay in the Moment.
곱씹을수록 참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둘째를 낳고 나선 첫째 때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큰 애를 키워보니 아이는 생각보다 금방 크고 '품 안의 자식'일 시절은 정말 짧다는 걸 깨달았고,
둘째를 통해 예쁘고 귀여운 아가를 키우는 기쁨과 행복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이번만큼은 내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그 귀한 시간에 'stay in the moment'하리라!
그 결심이 매번 성공한 건 아니었지만 눈에 잘 띄는 곳에 그 글귀를 두고 보며 의식적으로 노력하다 보니
그 백인 스님이 왜 그토록 '순간에 머물라'라고 강조했는지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다.
수유하다가 잠든 녀석의 작은 손이 살포시 내 젖가슴에 내려앉았을 때의 그 따뜻한 온기,
요가 시간에 온갖 잡생각을 내려놓고 내 호흡의 리듬에만 집중했던 순간,
처음으로 나를 위해 풋케어를 받았을 때의 그 작은 행복감,
긴 모유수유를 끝내고 좋아하는 매운 김치비빔국수를 먹었을 때의 그 개운함,
'뽀뽀'라고 하면 입술을 쭈욱 내밀며 달려오는 녀석의 천진한 미소,
둘이 같이 사이좋게 노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남편과 그 모습을 보며 절로 미소가 지어지던 어느 주말 저녁...
그때의 느낌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 순간에 온전히 집중했을 때, 그 순간은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혀서 두고두고 회자될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내 작문 노트에 써준 글귀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순간 속에서 영원을 잡는 숙영이가 되길 바란다.'
그땐 그 말이 이해가 안 됐다. 좋아하던 선생님이 써준 그 심오한 글귀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서
끙끙 애쓰다가 참지 못하고 선생님께 무슨 뜻이냐고 여쭈었을 때, 그때 선생님은 그저 씩 웃으시며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하셨는데... 20년이 훌쩍 지난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Stay in the Moment.
인생이란 보석처럼 빛나는 '찰나의 순간들'이라는 조각을 모아
'영원한 기억'이라는 이름의 모자이크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닐는지.
인생에서 빛나는 찰나의 순간들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는 순간순간들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반짝이는 순간들이다.
물론 아이를 키우면서 꼭 행복하지만은 않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그 힘듦을 상쇄하고도 남을 기쁨과 보람, 충만한 행복의 순간들이 더 많았다.
내년에도 그런 순간들이 더 많기를.
그리고 내가 그 순간들에 온전히 머무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