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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영낭자 Aug 22. 2017

아이와  놀(아주)기

내 남편의 육아법

토요일 새벽부터 지방 출장으로 집을 비운 남편을 대신해 독박 육아를 하게 된 날,

하루 종일 희운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거였다. 

"엄마 놀아주라~"

하지만 하루를 돌이켜보니 녀석이랑 제대로 놀아준 게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ebs 틀어주고,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보긴 했지만 

나는 드라마 기획안을 읽고 희운이는 티비를 보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난 후유증으로 10시에 깜빡 잠이 들어 소파에서 20분인가 자고, 

희운이가 배고프다고 깨워서 일어나 아점을 차려주고, 같이 밥 먹고 나서 

희운이는 혼자 뽀로로 책을 보고 나는 나대로 혼자 책을 읽으려고 하거나 틈틈이 집 정리를 했다.

희운이가 중간중간 심심한지 '엄마 놀아주라~' 했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거나

"응~ 잠깐만~"이라고 하거나 어떨 땐 아예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희운이의 성화에 못 이겨 놀이방에 가서 원목 기차놀이 장난감으로 잠깐 건성건성 놀아주고,

희운이가 유치원에서 만들어온 걸 소파에 누워서 보면서 영혼 없는 리액션을 해주고,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오전 시간이 다 갔다. 

희운이가 다시 파이어 로보 보여달라고 하면 그때서야 옳다구나! 하면서 얼른 틀어주고 

나는 주중에 못 다 읽은 밀린 신문을 읽고 책을 봤다.

파이어 로보만 한 똑같은 걸 3번은 봤나 보다.


점심식사로 간단히 먹일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을 때쯤 윗집 동갑내기 엄마가 

딸을 데리고 우리집에 와도 되겠냐고 연락이 왔다. 

그래, 누구라도 같이 있으면 둘이 잘 노니까~ 

나는 그런 생각에 얼른 오라고 했고, 예상대로 애들끼리 잘 노는 동안 윗집 엄마랑 수다를 떨었다. 

윗집 엄마도 주말에 일 나간 남편을 대신해 독박 육아 중이었으니 

같은 처지에 얼마나 할 얘기가 많았는지... 

하지만 애들은 저희들끼리 잘 놀다가도 또 가게 놀이를 하자고 우리를 초대했다. 

자기들은 가게 주인을 할 테니 우리 보고 손님 역할을 해달라는 거였는데 

윗집 엄마도 나도 아이들의 초대에 응하기는커녕 '니들끼리 놀아~'하고 거절했다. 

수다도 잠깐, 커피 한 잔 마시고 윗집 엄마는 소파에 누워 잠들었고 

나는 나대로 식탁에 앉아 다시 책을 읽었다.

그 와중에도 애들은 자기들끼리 노는 것도 부족했는지 자꾸만 저희랑 같이 놀자고 하고... 

나는 엄마도 여가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지속적으로 아이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결정적인 건 윗집 엄마가 다시 제 집으로 올라가고 

오후 간식으로 만두 먹으러 올라오라고 전화가 와서 올라갔는데

거기서도 희운이는 그 집 아이랑 잘 놀다가 또 나랑 놀고 싶었는지 '엄마 놀아주라' 했고, 

나는 급히 먹은 만두가 탈이 났는지 배가 아프기도 해서  집으로 가자고 애를 데리고 나섰고

희운이는 안 가겠다고 엉엉 울었다.

아이의 마음은 윗집 누나네서 엄마랑 같이 노는 거였는데 내가 놀아주지도 않고 

집으로 가자고 하니 당연히 속상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고, 집에 와서 놀아주겠단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또 졸려가지고 (이놈의 저질체력)  낮잠자자고 유도했다. 

희운이는 낮잠 자기 싫어했지만 내가 침대에 누워버리자 내 곁을 맴돌다가 할 수 없이 따라 잠들었다. 

 

그렇게 잠든 게 5시... 잠에서 깬 건 6시 좀 넘어서였는데 

차량이 도착했다(남편이 도착했다는 뜻이다)는 알람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희운이가 하루 종일 나에게 목말랐던 놀이 욕구를 푼 건 남편이 귀가한 후부터였다. 

나는 그때도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었고, 희운이는 지붕카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내가 차 타고 잡을 테니까 도망가는 거야, 알겠지?" 하고 제 아빠랑 잡기 놀이를 했다. 

남편이 도망치고 희운이는 잡으러 다니면서 얼마나 신나 하는지...

끼야아아~ 하는 즐거운 비명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지고  나도 그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희운이에게 빚진 것 같은 찜찜함과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희운이가 아빠랑 그렇게 논 건 채 5분도 되지 않았는데

그때 서부 턴 '놀아주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하루 종일 희운이랑 같이 있었어도 단 5분도, 아니 단 1분도 

녀석이랑 진심으로 놀아주지 않았구나 싶어서 너무 미안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종일 내가 책 읽을 시간만을 빼려고 했고, 수시로 해결해야 하는 집안일에만 골몰한 채

정작 가장 중요한 희운이의 욕구는 무시해버렸던 거다. 

희운이가 대놓고 '엄마 놀아주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는데도... 

그래, 하고 선뜻 대답하고 뭐하고 놀까? 했으면 희운이가 즐거워서 뭐하고 놀자, 엄마는 이거 해.. 하면서 놀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즐거움을 누렸을 텐데... 

아이는 부모가 자기와 즐겁게 놀아주는 데서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어느 육아서의 글귀가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희운이의 삼시 세 끼를 챙겨주고 약은 챙겨주는 기본적인 생존 욕구는 충족시켰을지언정

아이의 사랑에 대한 갈증은 채워주지 못했다. 

밥 챙겨주고 그냥 봐주는 건 엄마 아닌 다른 누구라도 해줄 수 있다.

아이는 내가 억지로 놀이에 참여하는 것과, 영혼 없는 리액션을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감춘 채

계속해서 나한테 '놀아달라'라고 부탁했던 거고 나는 그조차 무시해버렸다.


그렇게 보면 아이는 어른보다도 참 너그럽다. 

어른들은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아이의 행동에  인내심 있게 대처하지 못한다.

훈육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감정적으로 금세 폭발하는가? 나도 여러 번 그랬다. 

하지만 아이는 지속적으로 부모로부터 욕구를 무시당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자꾸 엄마 아빠한테 매달린다. 

입장 바꿔서 어른이라면 그럴 수 있나?

나의 욕구를 계속해서 무시하는 사람의 행동을 참아내고 그 사람에게 다시 매달릴 수 있나?

그렇게 보면 아이들이 참 짠하다. 

그렇게 무시를 당해도 어쩔 수 없이 부모라서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아까 낮에 윗집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교보문고 가서 사 왔다는 책 중에 부모를 바꿔준다는 짧은 외국 동화를 읽었는데

거기 보면 주인공 여자애가 부모가 자기에게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부모를 바꿔버린다.

뭐든지 다 해주게 하는 부모를 고르지만 알고 보니 그 새 부모는 자기를 '방임'한 거였고 

여러 유형의 부모들을 겪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자기 원래 부모가 제일 좋았음을 깨닫는다. 

그 여자애의 부모 역시도 떼쟁이 여자애네 집에 불려 갔다가 학을 떼고 

자기 딸이 그나마 괜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서로가 화해한다는 내용의 동화책이었다는데... 

그 이야기를 듣다가 보니 희운이라면 엄마를 바꾸고 싶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잘 놀아주지 않는 엄마. 자기 말은 한 귀로 흘려듣는 엄마. 밥만 먹으라고 하는 엄마... 


온종일 엄마랑 제대로 놀지 못한 탓일까?

희운이는 밤에 유난히 평소보다 잠꼬대를 심하게 했다. 

"엄마아아~~" 하면서 나를 원망하는 듯한 뉘앙스로 소리친다. 

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얘가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는 걸까? 걱정스러웠는데

확실히 오늘 희운이는 나한테 내내 불만이 쌓였을 거다. 

내가 자기 전 '오늘 그래도 좋아하는 TV 프로도 많이 보고, 윗집 누나랑도 놀고 실컷 놀았잖아'라고 달래니 

희운이는 '아니야 엄마랑은 많이 안 놀았어' 하고 부루퉁했더랬다.

"엄마아아아~~"

꿈에서도 욕구불만인지 울먹울먹 하며 잠꼬대를 하는 녀석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희운이를 잘 재우려면,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밥도 잘 먹이려면  잘 놀아주는 게 선결과제인 것 같다.

잘 놀아야 배도 고프고 피곤하고 졸릴 거 아닌가? 

그래, 결론은 '잘 놀아주기'다.

단 1분을 놀아도, 집안일  걱정일랑 잡생각들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아이와의 놀이 시간엔 놀이 자체에만 집중하는 거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아이와 함께 놀이에 '몰입'할 때, 아이도 행복하고 어른도 행복하다.

나는 아이와 놀아주는 그 시간조차 '육아시간'에 넣고 의무적인 시간으로 해석해버려서

놀이가 내키지 않고 기껍지 않았는데 이제 생각을 바꿔야겠다. 

아이와 노는 시간은, 나도 노는 시간인 걸로.

아이와 노는 시간이 나의 진정 행복한 여가시간이라고.  

그리고 그 행복한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금방 끝날 테니.

아이가 곧 크면 나를 더 이상 놀이에 초대하지 않겠지.

그때 아쉬워말고 지금, 아이가 날 찾을 때 잘해주자.


내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이 하는 말. 

"그걸 이제 깨달았어? 축하해~."

"뭐야,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아까 내가 희운이랑 노는 거 못 봤어?"

"봤지. 잘 놀아주대?"

"틀렸어. 놀아주는 게 아니야."

"그럼?"

"그냥 놀아. 아이랑 놀아준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야. 놀아준다는 건 어른이 아이에게 뭔가 베푸는 성격이고 수직적인 개념이지만 노는 건 같이, 평등한 관계에서 즐기는 거잖아. 오케이?"


오늘도 내 남편이 최고다. 


아이들은 놀 때가 제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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