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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영낭자 Aug 29. 2017

건강한 이기주의자가 되자

혼자 제주로 떠난 세 아이 엄마를 보며

우리는 같은 아파트, 같은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엄마들이었다. 이따금 아이들을 보내고 서로 시간이 맞으면 브런치를 먹으러 가거나 집 앞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며 서로 언니 동생 하며 친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살던 아파트 임대기간이 만료되면서 우리는 각자 다른 동네로 뿔뿔이 흩어졌고 언제 한번 봐야지 하면서도 근 반년 동안이나 통 얼굴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리웠다. 

때마침 중국으로 일하러 떠났던 한 엄마가 귀국 소식을 알리면서 이제 진짜로 만나보자 싶어 연락을 돌렸다. 그중 미용실을 세 곳이나 운영하며 제일 바쁜 엄마에게 먼저 전화했다. 그녀의 스케줄이 비는 날이 곧 우리의 모임날이 될 것이었기에. 그런데 뜻밖에 그녀는 멀리 있다고 했다.

"언니, 나 제주도야."

올여름 내내 너무 가고 싶었던 제주도! 휴가철 막바지 가족여행이라도 떠났나 싶어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와~좋겠다~ 애들이 좋아하겠네?"

"언니, 나 혼자 왔어."

"??"

그 짧은 시간 동안 '애들은 어쩌고?' ' 미용실은?' '혹시 남편이랑 싸웠나?' 별별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무슨 일 있니?"

나의 심각한 목소리에 그녀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왜, 애 셋 딸린 엄마는 혼자 여행 오면 안 되는 거야? 다들 그러더라, 무슨 일 있냐고. 아~ 슬프다, 슬퍼."

그녀의 말에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잠시 멍해졌다. 

그러게, 혼자 여행 떠난 애엄마를 왜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그래, 왜?

쪽팔리고 미안하고 바보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의 기분을 눈치챈 듯 그녀가 한 마디 덧붙였다. 

"나, 일이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서 왔어. 이번 주말에 올라가니까 곧 만나자."

그래, 잘 쉬다 오렴. 나는 긴말 않고 전화를 끊었다. 


혼자 훌쩍 떠날 수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나는 그동안 그럴 용기도, 생각도 없이 살아왔다. 

대학 때는 학자금 대출 갚느라고 남들 다 가는 흔한 배낭여행 한번 갈 여유가 없었고

결혼 후엔 집 대출금에 매달 신용카드 막느라, 아이가 생기고 난 후엔 바쁘고 힘들어서... 

여행은 시시 때대로 가고 싶었지만 언제나 후순위로 밀렸다. 

그렇게 살아온 게 벌써 9년이나 됐다는 걸 최근에 시엄니 칠순 기념 일본 여행을 위해 

여권을 다시 만들면서 알게 됐다. 

 새로 만든 여권아~내게도 혼자만의 여행을 떠날 용기를 다오 


여권이 이미 만료된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날짜를 확인해보고 깜짝 놀랐다. 

2008년에 신혼여행을 위해 만들고선 지금까지 내 여권은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했던 거다. 

2013년에 만료된 휴지조각 여권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신혼여행지 보라카이에서 석양에 물드는 아름다운 해변에서 남편이 했던,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이곳에 오자던 그 약속.... 에효~ 사는 게 뭔지. 


그동안 남편은 직업상 여권에 도장 찍을 칸이 없을 정도로 해외 출장을 다녔다. 

언젠가 한 번은 차를 타고 가다가 파란 하늘에 둥둥 떠있는 솜사탕 같은 구름을 보더니 그런다.

"유럽 하늘이 딱 저렇게 생겼어."

"글쎄, 난 유럽에 가본 역사가 없어서 잘 모르겠네."

눈치 없는 남편은 계속해서 뉴질랜드는 왜 소를 방목해서 키우는지 아냐는 둥, 유럽 사람들이 

왜 햇빛에 환장하는지 아냐는 둥 시시콜콜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유럽 아니라 제주도라도 

가봤음 소원이 없겠다며 뾰족뾰족하게 대답했다. 

때로 남편은 늦은 새벽까지 지인들과의 술 모임을 즐기다 왔다. 술에 취해 기분 좋아진 남편을 볼 때면

가끔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큰 애 낳고부터 저녁 약속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동네에 새로 생긴 맥주집이 괜찮다더라~ 수다 떠는 엄마들을 그저 부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둘째 낳고 모유수유 때문에 집에서도 술을 못 마시는 판에..... 

나도 친구들과 만나 밤늦도록 술 마시고 싶다고

혼자만의 시간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 때문에 온몸이 시들시들해질 때면

그렇게 남편에게 짜증이 났다. 


큰 애를 친정엄마가 봐주셨던 몇 년 전에는 나만의 여가시간이라는 게 가능했다. 

너무 보고 싶은 우주영화 '그래비티' 개봉 소식을 듣고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4D 영화관에서 중력 체험을 하며 보면서 얼마나 희열을 느꼈는지!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영화 끝나고 집에 가는 마음은 내내 무거웠다. 

나 대신 내 아이를 봐주시는 친정엄마는 무슨 죄란 말인가?

우리 엄마는 내가 알기로 극장 가서 영화를 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모시고 가려해도 

한사코 집에서 TV로 보면 된다고 거절하셨다. 그날도 아마 그런 이유로 나 혼자 극장에 갔을 거다. 

미안함을 간식으로 대신하며 집에 가자마자 엄마와 바통터치를 했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칭얼거리며 내 젖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나의 즐거운 여가를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담보되어야 하는 현실이 씁쓸했다.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그 뒤부턴 혼자 외출하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너무 지나친 죄책감이 아니었나 싶다. 

나부터 스트레스를 떨쳐 버리고 다시 힘내서 일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이를 보면 되는 것을...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며 TV에서 어떤 아동심리전문가가 그걸 '건강한 이기주의'라고 

부르는 걸 보고, 나도 '건강한 이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건만...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지 여전히 난 집과 회사만 오가며 살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제주도로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난 아이 셋 딸린 그녀의 용기가 부럽다. 

돌아오면 물어봐야지.

다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고 왔느냐고. 내게도 그런 용기를 전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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